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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난 명기다!! -70부(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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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후>>

 

 

뻐꾸기 시계가 실내를 울려댄다.
일곱 번이나 튀어나와 째잘대는 것이 굳이 시간을 보지 않아도 몇 시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듬직한 목덜미와 튼튼한 등 근육은 여전히 나를 황홀경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어젯밤도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나를 위해 봉사해 준 진호는 오늘도 아침도 눈을 뜨자마자 나의 가랑이 사이를 

파고 들어와 힘찬 허리 운동을 한다.

 

"하응...
자기야~ 아침부터 이러면...하윽~~ 반칙이야~"

"하아...하아~~ 매일 아침 해달라면서"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흐음..."

"그럼! 누가 한 얘긴데!"

 

언제나 진호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남자였다.
말도 되지 않는 투정에도 언제나 웃는 얼굴로 들어주기 바빴고

간혹 삐치기라도 하면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우스운 춤을 춰주기도 했다.
덩치가 곰같이 산만한 그가 애교를

부리면 울던 나도 금새 웃게 만드는 매력적인 남자가 바로 진호였다.

언제부턴가 무뚝뚝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가끔씩 겁이 날 정도로 

무표정한 진호의 얼굴은 모공을 수축시키 털을 세우게 만들었지만 내가 다가가면 언제라도 애써 밝은 표정으로 

바꿔주기도 했다.
언제부터라고 확신은 못하지만 부쩍 힘들어진 사회생활이 진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허읏! 허...허읏! 더...더 쎄게...세게"

"흐음! 흐윽!"

 

"아항...아...아흣...읏!"

"흐읏! 으....으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려면 아직 두 달이나 더 있어야 하지만 귓가에 은은히 들려오는 종소리가 온몸을 타고

퍼져 흐른다.
아침부터 느껴지는 이 아득한 느낌은 잔잔한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는 듯 몽롱하다.

허리를 쳐올릴 때 마다 출렁이는 가슴이 파도의 움직임처럼 잔잔하게 떨려오고 그 떨림은 점점 강하게 다가와

신경을 마비시킬듯 하다.

 

"하악~ 진호야...조..좋아~ 너 너무 잘해~ 흐음.."

"좋아? 우리 혜미가 좋다면 피골이 상접해진대도 난 행복해~"

 

"진호야~ 우리 아이 가질까?...하읏!"

".........나중에...
응? 나중에~"

 

일년전부터 발길을 끊은 엄마였다.
간간히 잘 지내냐는 안부의 전화외엔 온다는 말도, 오라는 말도 없는 엄마는

그저 행복하라는 말만 해 줄 뿐이었다. 

아이를 갖고 싶었다.
진호를 닮은 예쁜 아이를...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그런 형식적인 것은 안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이어지는 이 행복이 깨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엄마도, 그리고 진호도 아이 얘기만 나오면 정색을 하면서까지 미루고 또 미뤘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진호의 단 하나의 부탁인 그것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혜미야~ 우리..
사랑은 많이 하되 아이는 조금 나중에 갖자~ 응?"

"왜? 난 빨리 갖고 싶은데...
나 너 똑 닮은 아들 낳고 싶어~ 우리 낳자..응?"

 

"난..
아이 때문에 우리사이 방해받는거 싫어서 그래~ 아이만..
내 부탁 들어줘~ 다른건 내가 다 들어줄께"

"치~ 알았어! 대신에 아침저녁으로 한번씩 해줘야돼! 뿅뿅 갈 정도로~ 알았지?"

 

"알았어~ 내 힘이 닿는 한 그렇게 해줄께~"

"정말? 꼭이다!"

 

 

 

진호는 내게 그런 약속을 받아내고 매일 아침, 그리고 매일밤 항상 가랑이 사이를 파고 들어왔다.

농담삼아 한 말이었지만 진호는 그 약속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 매일 아침중의 하루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조금의 소홀함도 없이 언제나 마음을 다해서 정성스레 사랑해주는

진호를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아흐~~ 아흣! 흐음....음! 아! 아흣"

"후우~ 후우~..."

 

하나의 종소리가 두 개가 되고 두 개는 다시 네 개로 변해간다. 

종소리의 맑고 투명한 선율에 맞춰 나와 진호는 황홀한 세계로 초대받아 날개를 펴고 있다.

작은 종의 높은 선율이 울리면 머릿속까지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고 큰 종의 굵고 듬직한 베이스톤이 퍼지면

심장을 울리게 만든다.
하늘높이 두둥실 떠올라 그 선율에 맞춰 힘차고 유연하게 비상을 하는 나를 손을 흔들며 

지켜주는 진호의 웃음에 겁도 고통도 그리고 지난 아픈 추억도 모조리 날아가는듯 하다.

 

"어흑! 어흑! 아! 아흣!"

"허억~~~허억~~~~"

 

쳐올리는 허리에 가슴이 요동치는 것을 진호가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쥔다.
점점 손아귀에 힘이 강하게

느껴지며 부드럽게 잡았던 것이 아플정도로 느껴지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자지의 왕복이 더욱 빨라진다.

깊고 낮게 박아대던 패턴도 바뀌어 자지끝이 자궁에 닿을듯 깊숙히 찔러 들어왔다가 급하게 빠져나간다.

엉덩이와 진호의 피부가 부딫치며 쌕스러운 소리가 방안을 메우고 더욱 튼튼해지는 자지는 나를 무지막지하게

혼을 내주고 있었다.
질의 나의 또 다른 분신들도 흥겨워 하며 어깨동무를 하고 자지를 꼭꼭 물어준다.

 

점점 종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달뜬 가슴으로 너무도 멀리 날아 온 나였다.
웃으며 지켜보던 진호도 점점 멀어진다.

크게 흔들어대는 그의 손짓도 희미해진다.
그리고는 날개가 접혀 검은 나락으로 한없이 떨어진다.

 

"아! 아흑! 아~~악~~~~~~!!!"

 

한없이 추락하는 느낌에 온몸의 근육들이 수축을 해갔다.

움찔거리며 수축하던 몸이 너무도 강한 압박에 힘을 잃고 혼절을 해버리다시피 한순간 노곤해짐이 찾아오며

긴장을 풀어버린다.

울컥하며 애액이 쏟아지고 뒤이어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솟구쳐 올라가는 것이 보인후에 경련을 일으키며

침대에 몸을 떨군다.

 

"으드드드드....어흐..으으으..."

"하아~ 하아~ 오늘은 동시에 쌌네?"

 

"아으...으으으...지..진호야...나 안아줘..."

"하악..하악.....우리 혜미는 이렇게 느끼고 있을때가 제일 귀여워!"

 

진호는 축축해진 몸으로 내 몸위를 올라타며 강하게 안아주었다.
가쁜 숨을 고르며 한참을 안아준 진호는

피가 몰린 자지를 빼내며 옆으로 돌아 눕는다.
자지가 빠져나간 은밀한 부분은 시원함이 들어옴과 동시에

걸쭉한 애액이 흘러나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하아~~ 자기는 안싸?"

"난 이따 밤에! 힘 딸려!"

 

"하아...하아....아~ 개운하다~~~~"

"헤엑! 나 늦었다! 나 출근! 출근 준비한다~"

 

진호는 힐끔 시계를 보더니 잽싸게 튀어올라 욕실로 향했고 아직까지 쾌락의 여운을 느끼는 나도 서둘러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애액과 분비물로 엉망이 된 채 진호의 아침을 준비하는 나는 언제부턴가 아침마다 이런모습

이었다.

여름 햇살보다 밝고 강하지는 않지만 가을만의 은은한 냄새가 풍기는 햇빛이 블라인드 틈바구니로 파고 들어와

실내를 밝혀주고 있었다.

아침을 먹을새도 없이 대충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진호를 불러세워 우유 한 잔을 먹이고는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혜미야! 이따 병원 꼭 가! 알았지?"

 

대답을 듣기도 전에 후다닥 뛰어나가는 진호의 뒷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블라인드 틈을 살짝 벌리고 주차장을 바라보자 허둥지둥대며 자동차에 올라타는 진호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기지개를 크게 켜는 나는 소파에 앉아 느끼다 남은 여운을 느껴낸다.

 

 

>>>>>

 

 

베이지색의 코트와 가을의 향내는 너무도 닮아 있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선에 쌓인 플라타너스와 은행 단풍은

갈색과 노란색으로 변해 구석에 쳐박혀있다.
누군가에겐 좋은 눈요기꺼리이자 추억의 낙엽이겠지만 또 누군가

에게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할 녀석들이다.

또각또각 맑은 소리를 내며 걷는 이 공원길은 언제와도 기분좋은 그런 길이었다. 

가기 싫은 병원이었지만 진호는 항상 기억하고 있다가 다녀오라고 반 협박을 해댔다.
게다가 병원엘 도착하면

영상통화로 확인까지 시켜줘야하는 귀찮은 절차까지 밟아야 했다.

귀찮았지만 진호의 사랑이 느껴져 좋았다.
지금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운데 더 고칠것이 뭐가 있다는지 그것도

불만이었다.
그저 바람이 있다면 이 행복이 깨지지 않기만을 바랄뿐이었다.

언제와도 선뜻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 정신병동으로 향하는 나는 작게 고개를 떨구고 항상 가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또각! 또각!/

 

날렵한 구두굽이 인적이 없는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복도는 인적이

드물어 스산함까지 주는듯했다.

 

"저...저기..."

"네?"

 

처음보는 남자가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고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얼굴은 조금 난폭하게 생겼지만 웃는

얼굴이 선해보이는 남자였다.

 

"저..혹시 이혜미씨 아닌가요?"

"맞는데요? 저 아세요?"

 

작은 미소가 더욱 큰 미소로 바뀐 그가 반가워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남자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저기..
이런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 서준식이라고 합니다..
혹시 기억 하세요?"

"서...준식씨요? 저 죄송한데 기억이....
어디서 뵜었죠?"

 

"그..그게~ 한 5년전 쯤에 한주대 의과대학에서 그...
강승수...."

"한주대 의대요? 강승수? 저는 처음 듣는 얘긴데 잘못아신거 아니세요?"

 

가보지도 못한 한주대며 처음 듣는 이름들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그럼 혹시..
예전에 도서관에 음료수랑 쪽지는 기억하세요?"

"도서관? 쪽지? 아~ 그 항상 지켜보고 있다던.....후훗!"

 

어렴풋이 쪽지가 생각나는것 같았다.
시험 기간에 책찾으려 자리비운 사이에 올려져 있던 쪽지와 음료수.

그땐 왠 여자가 날 좋아하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네~ 우리 누나 이름이 서은지인데..
한국여대 영문과요~"

"어머! 반가워요~ 은지 잘 알죠~ 동긴데...은지 동생이었구나~"

 

"기억하신다니..하핫! 영광입니다"

"영광은요....은지 잘 있죠?"

 

"그럼요...누나 결혼했는데 모르셨나봐요~"

"네~ 제가 좀 사고가 크게 나서 많이 아팠어요"

 

"아~ 그러셨구나~ 혹시...
결혼하셨어요?"

"헤헤...네~ 조금 늦으셨네요!!"

 

준식이란 남자의 눈빛과 표정에서 아쉬움이라는 것이 잔뜩 묻어나왔다. 

 

'후훗! 지 누나 시켜서 갖다주라고 한 거 였구나!'

 

한동안 궁금해서 잠까지 설치던 그 쪽지의 실마리가 이제서야 풀리는듯 했다. 

그것이 은지의 남동생의 작품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새삼 예전의 나의 인기가 떠올랐다. 

 

'아우! 지금은 내가 한 남자한테 묶여 살지만 예전엔 날렸는데....
물론 지금이 더 행복하긴 하지만!'

 

준식은 많은 말들을 이어갔다.
우연찮게 만난 예전의 내 팬이 의사가 되었다는 말에 기특하기도 하고 조금은

아쉬움이 묻어나기도 했다.
전화번호를 묻는 그에게 버릇처럼 선뜻 번호를 알려주고는 작별인사를 나눴다.

 

"혜미씨! 반가웠어요...
가끔 만나서 차라도 마셔주실 수 있나요?"

"그..그러죠"

 

"아! 그리고 아까 하던 얘긴데요.."

 

나는 대답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식의 말을 기다렸다. 

 

"아..아닙니다.
잊고 사시니 오히려 마음이 놓이네요..
아무튼 그 땐 죄송했어요.."

"무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볼 일 보고 가세요~ 먼저 가겠습니다~"

 

급하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에 내달리는 준식을 사라질때까지 바라보는 나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상황을 알아야 궁금하기라도 할텐데 전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가 잘못 알고 있는듯 했다.

휴대폰을 꺼내 진호에게 병원임을 확인시키고 나는 항상 들어가던 주치의의 진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10분여간의 안부와 얘기를 나눈 후 다시 그곳을 빠져나왔다.

다시 온 길을 걸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발에 밟히는 낙엽이 바짝말라 으스러지며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고 올 때와는 달리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 들었다.

 

 

"어떠세요? 요즘?"

"좋아요..
행복하고요~"

 

"차도는 좀 있으셨나요?"

"아뇨...똑같은데요~ 이대로도 좋은것 같아요.
아니 이대로가 좋아요"

 

"해리성기억상실증은 감당하기 힘든 심리적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많이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혜미씨가 교통사고가 나면서 뇌에 충격을 받아 이상징후가 생긴 이유기도 하고 꼭 뇌에 충격이 없다 하더라도

극심한 스트레스나 견뎌내지 못 할 과거가 이런 결과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굳이 치료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억이 회복이 되는 경우도 있고요..
아니면 평생 기억을 못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환장애나 인격장애, 

그러니까 다중인격적인 성향을 띠기도 하는데 혜미씨는 그러한 증상들은 다행히 발견되지 않습니다.

초기에 인격장애가 조금 나타나기는 했지만 지금은 괜찮아지신것 같고요..
옆에 계신 남편분이 많이 아프셨을

꺼예요...."

"아~~~ 근데..
혹시..
사람의 기억이 바뀔 수도 있나요? 예를 들면 A라는 사람을 B로 착각한다던지..."

 

"음...흔치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저 이제 치료는 그만 받을께요..
잊고 싶은 기억을 굳이 되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들어서요"

 

"그럼, 그렇게 하시죠..
다만 머리가 이유없이 아프다거나 이상징후가 나타나면 내원은 꼭 해주시고요"

"그럴께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해리성기억상실? 쳇! 웃기시네! 이렇게 멀쩡한데 어디서 정신병자 취급이야!'

 

어느새 아파트단지에 들어선 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병원에 다녀 올 때마다 느껴지는 이 불쾌감은

오늘도 역시 한참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것이었다.
멀쩡한 사람을 바보 만드는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의사라는 사람들은...

 

 

>>>>>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거의 빈가지를 흔들어대는 나무들이 베란다 아래로 보이고 있었다.

곧 겨울이 다가온다는 예고라도 하듯 잔바람에 가지를 떨며 춥다고 말을 하는듯 했다.

하루하루 평온하게 지나가는 세월이 야속하거나 무언가 획기적이고 자극적인 일을 원하지 않았다.

내가 사고 후 바뀐 행동과 생각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예전엔 조금의 심심함과 무료함도 지루함에 버티지

못하고 언제나 일을 만들고 약속을 잡아 밖으로만 나돌던 나는 지금은 거의 외출을 하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고 평온한 일상적인 생활에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때되면 밥먹고, 씻고, 그리고 자고.... 

왠만하면 회식자리도 박차고 나오는 착한 진호의 큰 사랑을 받으며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생활을 

유지해가고 있었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모든것이 원점이었다.
친구들도 연락이 닿질 않았지만 찾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남자들의 전화도 끊긴지 오래였다.
아니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난 후로 남자와의

대화나 통화는 며칠전 만난 준식이라는 사내 뿐이었다. 

엄마에게 제대했다는 소식을 알려온 성현이는 왠일인지 단 한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와

유학을 핑계로 아직까지 성현의 얼굴을 보지도 못 한 것이다.
간간히 우리집으로 날라오는 각종 우편물 외엔

소식도 전화도 없었다.

 

'주소만 달랑 옮겨놓구...나쁜 노무시끼! 지 누나가 죽다 살아 났다는데....'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게 잘 따르고 언제나 위해주던 동생이 어느 순간 머리가 컸다고 나를 등한시 하는

것에 서운함이 밀려왔다.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려 감상에 젖은 나의 정신을 되돌려 놓았다. 

누가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는지 그 말을 무시라도 하듯 가을을 타는 나였다.

진호였다.

 

[어? 왠일이야? 방금 통화했잖아?]

[어...어..
혜미야! 쫌 이따 내 친구 갈꺼야~ 못 가게 꼭 붙잡아 놓고 있어~ 알았지? 꼭!]

 

진호의 목소리가 다급하고 애절하게 들려왔다. 

도대체 어떤 친구길래 그다지도 신신당부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목소리의 톤으로 봐서는 보통친구는 아닌듯

했다.
엄청나게 친한 친구이거나 각별했던 그런 사이인 것 같았다.

 

[어떤 친군데? 누군데?]

[어..그...그건 이따 얘기해줄께~ 근데 진짜 못가게 꼭 잡아둬야해 알았지?]

 

진호는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궁금했다.
그렇지만 진호는 잡아두라는 당부외엔 별다른 얘기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래서 결혼식을 올려야 하나? 우씨! 친구들을 하나도 모르겠잖아'

 

친구라는 단어에 대해서 단 한번도 언급을 하지않은 진호였다.
언제나 나와 자신, 그리고 엄마의 얘기외엔

화제가 다른곳으로 엇나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진호였다.
둘이 있을때는 사이에 다른이가 끼어드는 것이

싫다는 이유였지만 다른 이유가 있는것 같았다.
친구가 없다던지 더러운 성질 머리때문에 절교를 했던지.

그런 진호때문인지 나도 친구들을 찾을 생각이 없었다.
친구들 좀 만나고 여기저기 외출도 하라는 진호였지만

내키지 않았다.

손님이 온다는 진호의 말에 서둘러 거실을 치웠다.
침실은 언제나 엉망이었기 때문에 그저 방문을 닫아놓는

것으로 대신했고 토마토를 갈아 마실 것을 준비해 놓는 중이었다.

가을의 스산함이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더위와 추위의 중간이지만 추위에 더 가까운 햇살과 바람이었다.

기분이 좋질 않았다. 

방문하는 친구가 분명히 진호에게 빚을 졌거나 신세를 진 모양이었다.
여자의 육감으로 느껴졌다.

분명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었다.

 

/띵동! 띵동/

 

"누구세요~"

"저...저기..지..진호친굽니다"

 

들릴듯 말듯 중저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왓다.
문장 전체가 확실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진호의 이름을

확실하게 들었고 전화상으로 말한 친구가 온 것 같았다.

 

"어머 어서오..."

"....."

 

현관문을 열자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나도 그리고 그도 시간이 멈춘듯 멈춰서서

서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초췌한 남자가 서있었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크지만

너무도 깡말라 볼에 패인 우물이 너무도 깊게 보였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고 몸이 마비가 된 것 같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를 일이었다.

 

"드..들어 오세요.."

 

겨우 굳어버린 입을 떼어 들어오라는 말을 건냈다.

아무말없이 군화를 풀어내고 조용히 뒤따라 온 남자는 소파에 앉으며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무서웠다.

웃음없는 얼굴이며 짧게 깎은 머리가 갓 제대한 사람으로 보기엔 표정마저 너무 어두워 보였다.

갈아놓은 토마토주스를 들고 거실로 나가 앞에 놔주고는 할 일도 없는 주방에서 했던 설겆이를 다시 하고 있었다.

도저히 그와 마주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풀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 응어리지는 체증이

느껴지고 머릿속이 답답해져 왔다.

어색하고 음침한 침묵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덧 설겆이도 끝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놓아준 주스잔에는 토마토의 건더기가 말라 붙어있고 처음과 같은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전혀 움직임이 없는

남자였다.
처음보는 얼굴이었지만 나쁜사람 같진 않았다.
그저 풍기는 분위기가 살벌할 뿐이었다.

 

'어흐~ 진호는 무슨 저런 친구가 다 있대...'

 

첫인상이란 것은 너무도 중요했다.
한 사람의 이미지에 90%가 넘는 인식을 심어준다는 그 첫인상은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울해보이고 거칠어보이는 덩치가 큰 남자.
마치 범죄자로 보이는듯한 분위기는 나를 위축시켰다.

커피를 타 잔을 들고 거실로 향했다.
한겨울처럼 싸늘한 기운이 다시 한 번 몸을 타고 흘렀다. 

 

"저..저기 커피 한 잔 들면서 계세요~"

"가....감사합니다"

 

나는 건너편의 소파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어색한 분위기를 이겨내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진호의 간절한 부탁 때문에 남자가 혹시라도 몰래 가버릴까 은근슬쩍 지키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순간 정적을 깨는 남자의 말이 귀를 파고 들었다.

 

"누..누나~ 잘 지냈죠? 여전히 아름다워요"

"아..네...네에~ 감사합니다"

 

처음보는 남자가 선뜻 누나라고 하는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들려 어설프게 대답을 건냈다. 

 

"저..기...혹시 우리 예전에 본 적 있었나요? 저는 기억이 잘..."

 

남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잠시 쳐다보고는 슬픈 얼굴을 했다.
처음부터 슬프고 어두운 얼굴이었지만 더욱 

짙어지는 느낌이었다. 

 

"예전에..예전에....잠깐 뵌 적이 있었어요...아마 기억 못 하실지도 몰라요...너무...너무 잠깐이라"

 

그 후로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않은 그런 불편함이었다.
그 불편함을 깨보고자 서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를 할 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나오는대로 내질러버렸다.

 

"군대를 늦게 가셨나봐요..
제대를 늦게 하신거 보니..."

"아...네...그렇게 됐습니다"

 

"힘...드셨죠..
군대생활..."

"아뇨~ 할 만 했어요"

 

"아! 식사는 하셨어요?"

"그..그게~"

 

"아! 아직 식전이시구나! 잠깐만요~ 제가 차려 드릴께요~"

"괘..괜찬....."

 

특별히 준비해 둔 것도 없이 항상먹는 찬과 찌개를 준비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찌개라도 새로 끓여놓을껄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새로 하기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찬이 너무 없는것 같아 계란과 햄조각을 튀어내어

상을 차리고 남자를 불렀다.

어수룩하고 느릿하게 걸어 들어온 남자는 자리에 앉아 천천히 수저를 들고 밥 한 수저를 떠 입으로 집어넣었다.

 

"준비한게 없어서 어떡해요..
미리 전화를 받았으면 준비 좀 해 놓는건데.."

"아닙니다.
너무 맛있어요..
너무 그리웠던 맛이예요"

 

'얘 뭐니! 또라인가봐~'

 

밥상을 받아 한 수저를 떠 먹으며 눈시울이 붉어진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런 행동을 하는 남자가 이상하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웠던 맛이라던지, 청승맞게 눈시울을 붉힌다는것이

우습기도 하고 무언가 얽힌 사연이 많은 사람같이 보였지만 그런 이유보다 이상하게 보인 다는 말이 어울렸다.

 

"네? 아..네...
물도 드시면서 천천히 드세요"

 

남자는 코를 훌쩍거리며 손등으로 눈물과 콧물을 훔쳐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쳐지고 우울한 목소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똑같애..여전해...후라이 태워먹는거 하며 된장찌개에 호박껍질을 까넣는거 하며..."

"네?"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남자의 말이 정확하게 들리지 않아 제차 묻는투로 말을 건내자 남자는 다시 말을

전해왔다.

 

"예전에 제 여자친구하고 너무 비슷한 버릇들을 가지고 있어서요..
미안해요~"

"아니예요.."

 

"하하하...어쩜 그 여자하고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는지..
맛있게 잘 먹었어요"

"헤헤 다행이네요.
맛있게 드셨다니~ 앉아계세요 커피 드릴께요"

 

"아..아까 먹던것 있습니다~"

"다 식었잖아요..
가 계세요 금방 새거 드릴께요"

 

다시 커피물을 끓여 차를 가져다주고 상을 치워나갔다.
밥 알 한 톨 남김없이 깨끗히 긁어먹은 밥그릇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항상 맛없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하는 진호였지만 남자는 정말 맛있게 밥공기를 비워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차를 끓여 소파로 다가간 나는 다시 침묵으로 변해가는 분위기가 싫어 재잘대듯 말을 걸어갔다.

 

"우리 진호씨랑은 친하세요?"

"둘도 없는 친구였죠..아니 둘도 없는 친구죠"

 

"아! 그럼 우리 성현이도 아시겠네~"

"그럼요~ 잘 알죠! 엄청나게 친한 친구죠..
성현이 누나시잖아요"

 

"알고 있었어요?"

"그럼요..
대구 바닥에서 이혜미씨 모르면 간첩이었는데요..."

 

"어머~ 농담도..."

"농담 아니예요..
정말이예요~"

 

남자는 제법 어색함이 풀려나가는지 농담조로 말을 건내오기도 했다.
학창시절 인기가 조금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남자가 말하는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게 들려오는 농담이었다.

장난기와 농담에서는 결코 지지않는 나도 분위기가 풀려가자 서서히 장난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눠보니 의외로 순박한 구석이 있는 남자의 첫인상이 잘못된 인식이라고 경계를 풀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헤헤..
그건 그렇고 그 음식 못하는 여자친구랑은 이제 안 만나시나 봐요? 제대하자마자 친구집으로 달려온 걸

보면..."

"음식 못하는 여자친구요?"

 

"네~ 제가 한 것과 맛이 똑같다면서요..
그럼 못하는거지~ 저도 맨날 진호한테 구박 받는데요.."

"하하하~ 아니예요..
누나 음식 잘 하세요!"

 

"아~~~ 알았다.
미각이 둔하신가봐요? 아얘 맛을 못느끼시거나? 호호호"

"그..그렇게 되나요?"

 

남자와 나는 조금씩 가까워짐을 느꼈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기도 하고 학창시절의 연결된 고리를 찾아

얘기를 펼쳐 나가다가 광분을 하기도 하고 티없는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어느새 우울해보이고 슬퍼보이던 남자의 표정도 많이 풀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 웃기다! 정말 재밌는 분이셨네..."

"하하하..저도 몇년만에 이렇게 웃어보네요"

 

"자주 웃으세요~ 웃으니까 훨씬 잘생기셨네~"

"그래요? 그럼 이제부터 웃죠! 웃어야죠.."

 

남자의 얼굴은 다시 급격하게 굳어갔다.
맑게 번져가던 미소도 자취를 감췄고 특유의 어두운 표정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뭐 안 좋은일 있었어요? 얼굴이 너무 어두워요..
뭔진 몰라도 얘기해봐요~ 다 해결해 줄께요...헤헤"

".........."

 

"어? 안믿나보네? 원래 카운셀링이 특기이기도 하지만 벌써 몇년째 정신과 다니면서 이제 반 전문가 다 됐어요"

"저..정신과요?"

 

정신과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와 나도 놀라는 순간이었다.
괜히 말 잘못 꺼냈다가 정신병자로 의심을

받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아~ 저 교통사고 났었어요..
좀 큰 사고라 오랫동안 병원에 있다가 깨어났는데..
뭐 해리성기억상실인가

뭔가로 계속 환자취급을 하지 뭐예요..
이렇게 멀쩡한데...
저기 혹시 나 미친여자 같애요?"

"아..아뇨....저..절대요..
이제 몸은 괜찮으시구요?"

 

"네~ 보다시피 아주 건강해요.
그러니까 믿고 상담해 보라니까요? 시원하게 해결해 줄께요...헤헤"

"건강한 얼굴보니 마음이 놓여요"

 

남자는 간간이 대화에 어긋나는 말들을 쏟아내고는 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의 상처가 큰 것 같았다.

워낙 궁금한것을 못 참는 나이기도 했지만 이 남자의 얼굴을 편하게 되돌려놓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 이유도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자! 그럼 얘기해봐요..
누나가 잘 듣고 위로해주고 해결해 줄께요...헤헤"

"그..그게..."

 

"뭐 어때요? 내 동생 같아서 그러는거니까 빼지 말고..원래 남의 얘기 듣는거 디게 좋아해요~ 

같이 뒷담화까줄께요"

"후훗!"

 

"자! 시작!!"

 

남자와의 불편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주절주절 재잘거리는 나였지만 나로인해 남자가 더 불편함을 느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런 얘기라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면 어색한

분위기가 될것 같은 느낌에 강요를 하고있는 나였다. 

머뭇거리던 남자도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굳은 표정은 더욱 굳어지고 비장함까지 묻어나는듯 했다.

 

"저..기..그러니까...어렸을때 부터 짝사랑을 하던 누나가 있었어요.
그 누나는 착하고 예쁘고

몸매도 아주 끝내주는 퀸카였어요...누나같이.."

"어흐~ 아부가 지나치심!!"

 

"내가 기억하는 누나는 맑고 순수했어요.
언제나 장난기도 심하고 밝고 명랑해서 친구들한테 

인기도 많고..
특히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았어요.
어려서 아주 아픈 고통만 겪지 않았다면 티없는 

고결한 여자로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을만큼 매력적인 여자였죠"

 

남자는 아픈 고통에 대해 자세하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다친 것 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진지하고 진솔하게 얘기를 꺼내는 남자의 말을 가로막을 수 없어 조용히 듣고만 있는 나였지만 괜히 아픈 기억을

되내이게 하는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거워져갔다.
하지만 남자는 한 번 열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녀의 생김새, 버릇, 말투까지 모두 낱낱이 기억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처음 만난곳, 그리고 여행을 같이 간 곳까지 전부 기억을 하던 남자의 기억이 나와 진호의 기억과 너무도

닮아 있음을 느꼈다.
너무도 비슷한 시기와 연애얘기는 고향도 같고 나이도 같은 또래의 우연치고는 나의

귀를 더욱 기울이게 만들었다.

서서히 땅거미를 내리는 하늘에선 작은 빗방울이 떨어지며 바닥의 낙엽과 부딛쳐 은은한 소리를 냈지만

마치 음소거를 한 것처럼 영상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어머! 그래요? 예뻤나보다...그렇게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는걸 보니..."

 

잠시 식은 커피를 마셔낸 그는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음...솔직히 누나가 성에 대해 문란한 여자란 건 알고 있었어요.
알지만 사랑했어요.
너무 좋아했어요.

그저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모든것을 전부 이해해 줄거라고 다짐하고 또 약속했어요.

그런 행동이 누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이해하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녀가 없으면 못 살것 같았거든요.."

"착하다..
알면서도 그럴수 있나?"

 

혼잣말을 하듯 맞장구를 치는데도 남자는 아랑곳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병장휴가를 나오는 날이었어요.
항상 그렇듯 선임병이 후임병에게 밥을 사주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저도 밥을 사주고 전철을 탔어요.
지금 들어간다는 전화를 걸고... 

생각해보면 악연도 그런 악연이 있을까 할 정도로 전역한 군대 선배를 만나게 됐어요.
거기부터 꼬이기 

시작했죠"

"..............."

 

남자의 그렁그렁 고이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남자가 눈물을 보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너무도 자연스러운 눈물에 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진심을 담은 그의 얘기가 어느새 나의 눈물샘까지 자극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녀에 대한 나의 믿음이 약해졌던 걸꺼예요.
바보같이...

가야하는데 끝까지 술을 한잔 하자는 선배를 따라 술집도 아닌 그의 집으로 가게 됐어요. 

워낙 군대있을때 부터 잘해주던 선배였기 때문에 제가 잘 따랐었어요.
솔직히 차이도 많이

나서 말을 잘 들어야 했거든요.

사온 술을 조금 먹다보니 남자다보니 서서히 여자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죠.
뭐 자연스레

성적인 얘기도 하고...
그런데 갑자기 그 선배가 여자친구 얘기를 꺼내기 시작하더라구요.

뭐 간수를 잘해야 겠다는투로..
서서히 욕만 안 섞었지 모욕을 해대는 소리를 듣고만 있을수가

없었어요.
믿지도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조금씩 흔들렸던것 같아요.
그땐..."

"어머! 지가 뭐라구..."

 

"기분이 나빠 술만 마셔대고 있는데 자기 동기하고 동거중이라면서 정신차리라는 말을 하더군요.

내가 믿지 못하겠다고 얘기를 하니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동영상을 틀기 시작하더라구요.

동기가 찍어서 자신한테 줬다면서 자기도 놀랐다고......

두 번 다시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내용의 영상이 담겨있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어요. 

그 영상의 여자가 제 여자친구하고 너무도 닮은 거예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확인해기 위해 억지로 억지로 봤어요.

손가락의 반지, 목걸이, 알몸 그리고 그 집.
내가 아는 여자친구가 맞았어요"

"어떻게..."

 

"거의 미친놈이 되서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된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죠. 

얼굴은 가려 놓았지만 허벅지 뒷쪽에 난 점, 1년이 넘는 시간동안 같이 씻고 자던 사람의 알몸을 

못알아볼리 없었어요.
그 새끼였죠.
확실했어요"

"..........."

 

남자의 얘기에 푹 빠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자가 불쌍하고 그의 여자친구가 불쌍했다.

 

"패기 시작했어요.
더 이상 얘기를 듣고 싶지도 않았어요.
솔직히 죽일생각으로 패기 시작했어요.

왜 그랬냐고 물으니 처음엔 아니라고 발뺌을 하던 그 새끼는 자신이 아는 모든 얘기를 꺼내

놓더군요.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지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지만 봐주고 싶은 맘은 없었어요.

자신의 동기하고 내기를 했다더군요.
내 여자친구를 소개시키며 관계를 맺을수 있는지 없는지.

믿을 수가 없었던게 아니라 안믿었어요.
차라리 그게 사실이래도 나는 사랑하는데..
좋은데..

벌레같은 새끼들한테 당하고만 있던 여자친구가 불쌍했어요. 

고통스럽게 죽여버리고 싶었어요.
3일간 정말 죽일 작정으로 패기 시작해서 집이 무너질 정도로 

밤마다 난리를 치니 이웃사람이 신고를 한 것 같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도망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망을 가면서도 그 새끼를 죽여버리지 못한게 원망스럽더라구요"

"흐흑~~"

 

"도망을 친날 밤 소주를 사서 마시고 그녀의 집을 갔어요.
맨정신으로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 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더 멀쩡해지는것 같더라고요.
동영상이 자꾸 생각나 미치겠더라고요.

처음으로 미웠어요.
처음으로..
근데 저는 또 실수를 했죠.
술에 취한척 그녀를 겁탈하려고 하다

흘리는 눈물에 내가 실수한 것을 알아챘죠.
미안했어요.
정말 너무 미안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집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스스로 헌병대로 들어갔어요.

그게 그녀를 본 마지막이예요"

"그럼 그 선배는 어떻게 됐어요? 먼저 때렸다고 해도 그사람이 잘못한거잖아요.."

 

영화같은 얘기를 들었다.
어떻게 저런 어린 나이에 한 여자를 자신보다도 사랑 할 수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남자의 사랑은 투철했다.

 

"그녀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웠어요.
나의 죄를 깎아내자고 그녀의 아픔을 되내이게 하는건 더 

싫었죠.
차라리 내가 조금 고생하면 그녀는 다시 아픈기억을 떠 올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요. 

다행히 그 선배도 자신의 잘못을 얘기하지 않아 그게 고마웠죠.

여자친구가 아픈건 죽는것보다 싫었으니까요.
들어가기 전에도 부대며 판사님이며 애원을 했죠.

제발 그녀는 모르게 해 달라고요"

"그럼 혼자 다 뒤집어 쓴거예요? 바보같이?"

 

"바보같다고 손가락질해도 싸죠.
저는 그녀를 그만큼 사랑했어요.
더 주지 못해 아쉬울뿐이죠.

합의금도 없고 하반신이 마비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철창행을 선택했어요.
곁에서 지켜주지

못하는것이 억울할 뿐 다른건 없었어요.
그리고 오늘이 군생활을 끝내고 나오는 날이예요.

진호보고 이번엔 그 동기라는 놈을 만나보려구요.
정말 내기에 의했던건지 사랑을 했던건지"

"여자 친구는요? 연락해 봤어요? 사실대로 얘기하면 다시 돌아올꺼예요"

 

남자의 얘기를 듣는동안 나도 모르게 내 얘기인 것처럼 느껴져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내야 했다.

너무도 멋진 남자였다.
자신의 모든것을 버리면서도 자신의 여자를 지키려고 한 남자의 사랑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지금 잘 살고 있네요..
행복하게.
예전모습 그대로 장난기 넘치고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

"봤어요? 연락 됐어요? 찾아가세요...내가 같이 가줄까요?"

 

그런 사랑은 지켜야 했다.
남자의 정성이 헛되는 일이 없도록.

 

"하하하..
누나같으면 그런 바보같은 남자 받아줄꺼 같아요?"

"당연하죠! 결혼을 했다해도 이혼을 해서라도 가야죠..."

 

"누나 덕분에 마음이 한결 후련해 졌네요..
고마워요~"

"고맙긴요...."

 

"그만 울어요~ 자기일도 아니면서..그나저나 진호가 늦네!"

"금방 올..."

 

"자! 이거! 예전에 진호한테 빌려간거예요..진호오면 나중에 만나자고 전해주세요 약속이 있어서.."

"안돼요! 진호가 붙잡아 놓으라고 했어요!"

 

나는 남자의 손을 잡아채며 일어서는 그를 막아섰다.

예비군 마크가 달리 모자를 눌러쓰는 남자는 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소리없이 흐느끼는지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떠오른 아픈 기억 때문이라고 생각들었지만 내가 해줄게 없었다.

 

"저..저기...미안해요..내가 괜한걸 물어서..."

 

소리없이 흐느끼던 남자가 나지막하게 말을 걸어왔다.

몸과 가슴을 떨리게 하는 지독히도 간절하고 애절한 목소리였다.

 

"누나! 나 누나 한번만 안아봐도 돼요?"

 

간절하고 애절한 목소리에 신경이 마비 된 듯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말도, 행동도, 그저 그의 얼굴에 눈을 맞추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바라보다 대답 대신 그의 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편안했다.
그 누구의 품보다 따뜻했다.

천천히 나의 몸통을 둘러오는 남자의 팔엔 형언할 수 없는 강한 힘이 느껴졌고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릿속이 하얘지며 커다란 망치로 강하게 때려내는듯한 느낌과 함께 강한 두통이 찾아오고 있었다.

 

".........."

"잘 지내요~ 아프지 말고...
혹시라도 나중에 저를 또 보는 날이오면 그날은 오늘처럼 그냥 가지 않을꺼예요"

 

"무..무슨 소리...예요?"

 

도망치다시피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군화도 신지 못하고 들고 뛰는 폼이 우스꽝스러웠지만 절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봇물 터지듯 뜨거운 눈물만이 두통과 함께 짝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건내고간 작은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진호에게 빌려 갔었다고 했던 물건이 들어있는듯 했다.

 

'역시..
뭔가를 빌려갔던게 맞긴 맞았구나!'

 

찢어지는 가슴을 후벼 파고 들어오는 가을 바람이 너무도 시렸다.
차갑다 못해 아리기까지 했다.

쇼핑백 안엔 얼마나 보고 또 봤는지 나의 사진들이 낡고 낡아 쇼핑백안에 고이 들어가 있었다.

웃는 사진, 찡그린 사진, 비키니를 입은 사진.

열댓장이나 되는 사진을 왜 그 남자가 갖고 있었는지 모를일이었다. 

짖누르듯 찾아오는 두통에 머리가 깨질듯 아파와 양손으로 머리를 싸잡고 고통을 짖눌렀다.

 

'하아~ 찬바람이 맞고 싶어...찬바람이...'

 

베란다로 나가 소리없이 내리는 가을비에 손을 내밀어 본다.

차갑고도 부드러운 그렇지만 결코 기분을 망치지 않는 보슬비가 주륵 흘러내린다.

나의 눈물과 짜기라도 했는지 그 빗물이 꼭 나의 눈물인 것 처럼 뜨겁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

 

 

거칠고 퀭한 남자의 얼굴이 희미해져갔다.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나듯 강한 충격과 기 충격으로 부서진 파편들이 뇌의 곳곳에 박히듯 욱신거림과

쓰라림보다 더 아픈 아림후엔 연근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버린듯 허전함까지 찾아왔다.

희미해짐은 점점 어둠으로 변해 다시 검은 나락에 몸이 던져졌다.

 

'앗! 여긴 어디지?'

 

또 길을 잃은 나였다.
걸리적거림도 없고 막아서는 것도 없는 광활한 그곳에 내던져져 빛을 찾아 내달렸다.

역시 숨이 차지도 않고 다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그리고 막아서는 벽도 없었다.

그저 한치앞을 내볼 수 없는 어둠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눈물만 훌쩍였다.

 

'나가야 해! 여기서 나가야 해....'

 

헬쓱해진 얼굴과 말라붙어 뼈만 앙상한 노인이 다시 내앞을 가로막고 나타났다.

역시 길게 자란 수염과 세수를 하지 않은것 같은 꼬질한 노인의 형상이었다.

 

"왜? 너의 아픔이 아깝더냐?"

"흑흑...제발 돌려주세요...제발...."

 

다시 올 것을 알고나 있었다는듯 기분나쁜 웃음을 날리는 그 노인은 정신없이 주위를 돌며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검은 옷을 찰랑거리며 좌우로 왔다갔다 하던 노인은 곧 자리에 발걸음을 멈춘다.

 

"왜! 아픔없이 행복하기만한 것도 재미가 없나보구나?"

"잘못했어요..
돌려 주세요....
제가 아픈게 나아요..더이상 다른 사람들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여전히 이기적이고 너만 생각하는구나! 네게 다시 고통을 돌려주면 또 아픈 사람이 생기는데..."

".........그...그럼..."

 

"돌려주면 또 못된 사냥이나 하고 돌아다니려고!!"

"아녜요...흑흑...
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

 

"다시는 오지 말거라! 줬다 뺐는것도 한도가 있지..
인간들이란....쯧쯔"

".........."

 

점차 어둠이 걷혀가고 있었다.
그 어둠은 다시 순백의 흰색으로 그 순백의 낱낱은 사물들로 이어졌다.

그렇게 어둠은 차차 사라져갔다.

차차..

 

 

"누나! 누나! 정신 좀 차려봐~~~"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많이 본 광경.
침실이었다.
그렇게 짖눌러대던 두통의 고통도 말끔히 사리진듯 했다.

뿌옇게 시야에 들어오는 성현의 모습과 걱정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다급하기까지 하다.

진하게 흘러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부셔 제대로 눈을 뜰 수 조차 없었다.
너무도 강한 햇빛이었다.

 

"지...진호야!!! .....어? 지...진호는?"

 

얼굴엔 식은땀이 잔뜩 흐르고 갑자기 머리가 핑~돌만큼 어지러웠다. 

눈을 뜨자마자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진호를 찾는 나였다.

 

"날 왜 그렇게 찾아헤메실까? 혜미씨!"

 

숨어 있기라도 하듯 문지방을 넘어오는 진호의 모습은 언제 그렇게 살이 붙었는지 생기가 넘쳐 흘렀다.

짧은 머리, 건실한 체격..
진호였다.
성현과 나란히 서서 장난기 섞인 웃음을 번지고 있는 그였다.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핑돌다 못해 주륵 흘러내려 콧물을 동반해 못난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흑~흑...미안해...진호야..."

 

닭똥같은 눈물을 흘려내며 울고있는 나를 보며 성현과 진호는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미안함에 서러워 어깨를 들석이던 나는 자연스레 울음이 그쳐갔다.

 

"왜 웃어~~ 흑! 후~울쩍!!"

"왜 울어? 꿈속에서 바람폈지? 그치?"

"야야! 뻔해뻔해...저 변순이....으이그..."

 

"어? 어? 꿈?"

"크크큭!! 내가 그럴줄 알았어~~암튼 우리 누나는 별종이야~ 꿈도 아주 장편 대하소설을 쓰고 나오셨구만!"

"무슨 잠을 그렇게 자냐!!"

 

'꿈?'

 

나는 서둘러 시계를 바라봤다.
한겨울..
진호의 위로휴가 둣째날이었다.

대구에 있던 성현이 진호의 휴가소식을 듣고 올라왔던 것이었다.
이불속엔 아직도 옷을 챙겨입지 못한 

나의 알몸이 부드러운 이불에 부벼지며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누나! 어우 드러~ 코 좀 닦고 쫌! 아이구 가지가지 했구만! 침두 흘리면서 잤네! 드러~ 야! 빨랑 데려가

지겹다 이제...
저 몰골 보는것도!"

"훌쩍...
침?...
말라 붙었어?"

 

웃고있는 그들틈에서 무안함과 미안한 쑥쓰러움과 부끄러움을 한몸으로 받아내며 말라붙은 입가의 침을 

비벼댔다.

 

"야! 안진호! 너 도대체 우리누나를 얼마나 괴롭혔으면...

아무리 친구래도 처남앞에서 보일꼴은 아니라고 보는데! 흑곰 이새끼 죽여 버린다!"

"처...처남! 그...그게 아니라 우리 자기야가 날 덮친거라구!"

 

"웃기지마! 혹시 누나 아직까지 빨개벗고 있는거야?"

"이새끼들이! 듀글래!! 나가!!!! 꺼져!"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도 사랑스러우리만치 맑았다.
옷을 입는 것도 잊은채 나는 서둘러 효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너무 생생했던 것이 꿈이었다는게 믿기질 않았다.

 

[어우...혜미쓰! 왠일이야? 어제 진호랑 죽도록 뒹굴렀겠는데?]

[야! 스..승수는?]

 

[왜? 승수는 왜? 아까 동아리 선후배들이랑 등산간다고 나갔는데?]

[잘 지내지? 혹시....때리거나...]

 

[죽을라구 누구한테 손찌검이야!! 헤헤]

[그치? 듀글라구......헤헤헤헤]

 

다행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창밖의 해님도 기분좋게 미소를 보내주는 것만 같았다.
기분좋게 커다란 기지개를 힘껏 켠 나는 늦은 오후를

단번에 깨낸다.
봉긋한 가슴도, 빵빵한 엉덩이도, 잘록한 허리도 모두 내 모습 그대로였다.

거울에 얼굴을 비쳐보며 눈을 반으로 접어본다. 

맑고 하얀 피부에 잘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혜미야! 이제 행복해져야지?'

 

'사랑해~ 진호야....사랑해~ 성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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