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의 서열과 앞뒤를 생각하는 주숙예 등은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장능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행동! 장능은 뱃속의 아이를 장강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수채와는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평소에 장능을 우습게 보던 채주들은 당황했다. 장능은 다른 것은 몰라도 한 번 뱉은 말은 그대로 옮기는 자였고 총채 수하들의 눈빛은 장능의 명을 그대로 쫓겠다는 의지를 총총히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주들은 우왕좌왕 했고 그때 추운객이 나섰다. 장강수로연맹의 초대 총채주, 수룡왕의 오랜 지기(知己)인 그는 다른 말은 않았다. 단지 뱃속의 아기에 대해 후견인을 자청했을 뿐이다. 그것으로 군산의 회합은 끝났다. 태부인의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직은 모르는 상태였다. 만약 태어날 아이가 여자라면 추운객으로부터 수룡왕과 전대 총채주와의 의리를 모른 척 하는 자들이라는 내심(內心)의 추궁을 쉽게 면할 수 있다. 그리고 장능과 총채를 상대로 얼굴을 붉힐 이유도 없었다. 채주들은 회합을 미루었다. 몇 개월 후, 태부인은 아이를 낳았고 채주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 아이는 남자였다. 그렇게 따지면 사실 태부인과 백흥악이 아직 총채의 주인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장능의 공이다. 하지만 장능은 그 이상의 일화(逸話)를 만들지 못했다. 대접전 당시 장능은 황룡당주를 맡고 있었다. 일개 무사로 수룡왕을 추종, 장장 사오십 년을 장강의 물길을 오간 공에 비하면 형편없는 직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능은 황룡당주의 자리도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당주의 자리는 그에게 과분했다. 일개 낭인(浪人) 무사 출신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무공은 당주가 갖추어야 할 실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채주들이 그를 깔보는 이유다. 내삼당의 당주나 총관이 그에게 딱 어울렸을 직함이었으나 장능에게는 이재(理財)에 대한 술수도 지모도 없었다. 그럼에도 전임 총채주, 백승명이 장능을 황룡당주에 임명한 것은 역시 그가 오랫동안 총채에 바친 충성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룡당주를 끝으로 칼을 풀었을 장능이 총채에서 총채주의 다음 자리라 할 수 있는 승룡전주가 된 것은 단도의 대접전이 끝난 후였다. 단도의 대접전에서 전임 승룡전주, 묵룡당주가 죽었기 때문이다. 마땅한 후임자가 없었다. 결국 태부인은 고심 끝에 총채 최고의 연륜을 가지 장능을 승룡전주로 임명하게 되었다. 만약 장능이 전임 승룡전주, 불패혼(不敗魂) 이산(李産)처럼 실력을 갖춘 승룡전주였다면 작금의 총채와 수로연맹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이토록 혼란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승룡전주로서 장능의 권위는 총채에서나 조금 인정될 뿐 각 수채들에게서는 전혀 아니었다. 수채에서 장능을 인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의 우직한 충성심뿐이었다. 그 같은 사실을 가장 괴로워하는 자는 물론 장능 스스로였다. 그는 서둘러 승룡전주의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으나 당분간 총채에 승룡전주를 맡을 후임자는 나타날 조짐이 없었다. 그런 차에 위무일이 나타났으니 그는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지장보살을 만난 기분이었다. "도와주시오." 고집스럽게도 우직한 얼굴! 위무일의 무심한 얼굴에 결국 표정이 드러났다.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왜 도와주지 않겠다는 것이오?" 장능이 꾸짖듯이 말했다.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인데 도우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위무일에게 어떤 고충이 있을 것이라고 주숙예는 미루어 판단했다. 따라서 주숙예는 장능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러나 장능에게 위무일의 사정은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그야말로 사사로운 개인의 사정 이상이 아니었다. 총채는 호반영주가 죽음으로써 지키려 한 곳이다. 따라서 아들인 그가 총채를 돕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또한 수룡왕과 전임 총채주인 백승명이 그를 얼마나 아꼈는가? 그 의리만 가지고도 위무일은 당연히 총채를 도와야 했다. 위무일은 장능의 눈길을 피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힘든 자들은 장능과 같이 자신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밀어붙이는 자들임을... 될 수 있으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장능은 주숙예처럼 등을 돌릴 수도 없는 자였다. 백승명이 어릴 때 장능은 백승명의 호위 무사였다. 따라서 장능은 백승명이 가는 곳 어디든 따라다녔다. 백승명은 주로 위무일과 어울렸기 때문에 위무일도 장능을 아저씨라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 장능은 여름이면 높은 나무의 과일을 따다 주었고 겨울이면 그들의 신발을 데워 주었다. 백승명과 위무일에게 아버지, 어머니를 제외하고 최고 좋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들은 장능으로 대답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장능은 물놀이 도중 급류에 휩쓸린 위무일의 목숨을 구해 준 적도 있었다. "이 일, 저 일도 하기 싫은 분이 이곳에는 왜 왔습니까?" 장능의 노화 섞인 질책이 이어졌다. '이곳에 왜 왔는가?' 마지막 인사를 위해서 왔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하니 그 대답은 스스로를 납득시키기도 힘든 대답이었다. 총채에 인사할 그 누가 있다는 말인가? 인사를 위해서가 아니다. 만로방을 치는 일을 협의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유가 있었겠지.' 위무일이 그 같은 대답으로 자신의 의문을 비켜 갔다. 그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장(張) 숙부(叔父),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소. 다만 총채를 위해 노력하리다." "그런 말을 듣고자 내가 이곳에 온 줄 아시오?" 장능이 그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았다. "장 숙부, 숙부는 어릴 때부터 나를 지켜보아 잘 알 것이오. 나는 누구를 위할 줄 모르는 사람이오." "아니외다! 소영주는 그런 분이 아니셨소! 내가 아오!" 장능이 소리쳤다. "귀찮소. 옛일을 핑계로 나를 잡을 생각은 마시오." 위무일은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능을 떨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 .... " 장능이 이를 깨물었다. 그의 어깨에 피가 흘렀다. 스스로 낸 상처였다. "나와 맺은 인연도 귀찮겠지. 내가 끊어 드리리다. 총채를 떠나기 전, 이 추악한 늙은이의 심장을 보게 될 것이오." 땡깡! 장능이 자신을 찌른 단도(短刀)를 던졌다. 그가 휙 등을 돌렸다. '어렵군.' 위무일이 고소를 흘렸다. 엽광은 넓적한 침상에 앉아 아직도 칼날을 맞추고 있었다. 그가 침상에서 일어나며 옷의 주름을 폈다. "이미 맺은 인연을 모른 척 하며 살아가기는 정말 힘들군. 나 같은 사람은 오지에 숨어 세상을 등질 자신도 없으니... " 엽광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주숙예, 장능의 방문! 티격태격 해도 총채와 호반영채는 가장 가까운 식구다. 총채를 대하는 엽광의 마음에 약간의 변화가 생긴 모양이었다. 용연향(龍涎香)이 피어오르는 계단 위에는 호피(虎皮)가 깔린 두 개의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총채주의 자리가 공석이니 태사의에 앉은 사람은 물론 장강의 태부인인 담청, 그녀 혼자 뿐이었다. 태사의 아래는 족히 이십 여명이 앉을 만한 긴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긴 탁자를 지키고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와룡전주 주숙예! 담청의 표정은 침울했고 주숙예도 결코 유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장 전주도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니... " 담청이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저렇게 총채의 일을 나 몰라라 하는지... " 주숙예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담청이 수건으로 이마를 가렸다. "정말 그의 실력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그녀가 물었다. "소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위 공자의 무위는 만로방 뿐만 아니라 수채의 채주들도 주눅이 들게 할 정도였으니까요. 벌써 만로방의 세 개 분회가 불탔습니다." 뻔한 물음에 대한 주숙예의 성실한 답변이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만한 무공을 지닐 수 있었을까요? 소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총채주도 호반영주도 그에 비견하기 힘들 것 같으니... " "저도 그것이 의문입니다." 주숙예가 미간을 좁혔다.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 위 공자를 잡는 일은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 전주도 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으니... 애초에 불덩이 같은 자!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위무일에 대한 미련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담청은 위무일에 대한 이야기를 끝낼 수 없었다. 위무일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필요하겠지요?" " .... " 주숙예가 흘깃 담청을 바라보았다. 꽉 다문 입술! 위무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만로방과의 싸움이 목적이라면 그에게 굳이 손을 내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주인을 총채주에 앉히시려면 위 공자가 아니면 안됩니다. 장 전주의 호기는 채주들을 더 이상 위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추운객 어른은 행방조차 묘연하니... 계신다고 하더라도 총채주의 일에 간섭할지도 의문입니다." "알았어요." 담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직접 만나 보실 생각이십니까?" " .... " 담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에만 골몰했다. 주숙예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수룡채를 걸어나갈 때였다. "주 전주!" 담청이 주숙예를 불렀다. "오라버니는 아직 못 찾았나요?" "앵앵이라는 여자와 여행 중이라고 합니다.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순무당(巡撫堂)에서 찾고 있으니 곧 연락이 오겠지요." "이렇게 긴박한 시기에 여행이라니... 순무당주에게 명을 내려 주세요. 앵앵이라는 계집은 발견되는 즉시 목을 베라고... " 담청이 탄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주숙예가 읍을 하고 수룡채를 물러났다. 담청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창가에 몸을 기댔다. 동정호의 낙조(落照)가 군산을 물들이고 수룡채를 물들였다. 그녀는 일몰(日沒)에 몸을 내던진 채 꼼짝을 않았다. 어떻게 하던 만나야 하는데 몸은 그녀의 의지를 쉽게 따라 주지 않고 있었다. 생각만 하면 전신의 힘이 빠졌다. 담청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도 만나야 할 자였다. * * * 군산의 호변은 물안개로 뿌옇게 흐려 있었다. 이른 새벽! 대 여섯 개의 화톳불만이 새벽을 밝히고 있었다. 화톳불 주변을 뒹굴며 누운 자들은 배를 만들기에 분주한 목수들이었다. 단도의 대접전에서 총채는 만로방의 화기(火器)에 의해 선단의 칠 할을 잃었다. 총채는 선단의 복구에 노심초사했으나 각 수채의 총채에 대한 지원이 이런 저런 이유로 늦어져 단도의 대접전이 끝난지 이 년이나 지난 지금도 예전 선단의 반을 복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위무일은 곤하게 잠든 목수들을 지나쳐 군산의 한적한 호변으로 걸었다. 철썩! 한 척의 나룻배가 강물에 씻기고 있었다. 위무일은 그 배를 향해 걸어갔다. '망상(妄想)이 쓸데없는 일을 불렀다.' 그는 그 배를 타고 군산을 떠날 생각이었다. 엽광은 깨우지 않았다. 엽광의 마음은 하루 사이에 총채에 대한 지원으로 기울어 있었다. 위무일은 엽광의 그 같은 생각을 존중했다. 깨어나서 그가 없어진 것을 알면 화를 내겠지만 총채의 어려움을 자신 대신 도와주라는 의중을 엽광이 알리라 믿었다. 산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눈과 귀는 모두 위무일에게 쏠려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용케도 위무일이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산고는 어갑피를 벗고 총채의 여자들이 마련해 준 경장을 입고 있었다. 꽃무늬가 새겨진 경장은 날렵하고 맵시도 있었다. 하지만 편하기야 역시 어갑피가 나았다. 그럼에도 산고가 경장을 걸친 이유는 그녀도 여자였기 때문이다. 산고는 약간의 불편함 보다 화려함이 좋은 모양이었다. '궁장이라도 얻었으면 군산을 떠나려 하지 않았겠군.' 위무일이 산고를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어갑피를 입은 산고 보다 분홍빛 경장을 걸친 산고의 모습에 눈이 더 즐거워하는 것은 위무일도 막을 수 없었다. 산고가 물위에 떠 있는 나룻배로 가기 위해 옷을 걷었다. 텀벙! 그녀가 물을 차고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위무일도 신형을 날렸다. 산고가 나룻배에 매어 둔 줄을 풀고 힘차게 노를 저었다. 그때였다. "가지 마세요!" 허겁지겁 달려와 동정호의 물에 발을 담그는 여인! 바람이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었고 세월은 눈가의 주름살을 늘였다. 도화빛 뺨, 붉은 입술, 손톱에 꽃물을 들이던 여인은 간데 없고 모든 것이 질리도록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웠다. - 부용여면(芙蓉如面) 쟁망득(爭忘得)! 연꽃 같은 얼굴, 어찌 잊으리! 담청! 머리가 멍해지고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모습은 꿈에서 보았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왜 이곳에 왔는가?' 그제야 위무일은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궁금했다. 어떻게 변했는지... "흥!" 산고가 까닭 없이 화를 냈다. 그녀는 노로 물을 찼고 위무일은 등을 돌렸다. "가지 마세요." 담청이 나룻배에 매어진 긴 줄을 잡았다. 동정호의 물살은 출렁이고 산고의 노질은 거셌다. 담청이 나룻배에 끌려 동정호의 수심으로 점차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무릎이 잠기고 허리가 잠겼다. 그때였다. "태부인!" 후다다다닥! 한 떼의 사람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승룡전주, 와룡전주 각 당의 당주들이었다. 그들의 소란에 목수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태부인!" 장능 등이 무릎을 꿇었다. 담청이 줄을 놓았다. 산고도 떼거지로 몰려온 사람들에 놀라 노질을 멈춘 상태였다. 철썩! 철썩! 사위는 조용했고 공교롭게도 수초에 걸려 앞을 나아가지 못하는 나룻배만 물살을 찼다. "모두 물러나세요." 담청이 맥빠진 소리로 말했다.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 장능이 탄식을 터뜨렸다. "물러납시다." 주숙예가 장능을 이끌고 먼발치로 물러났다. 그제야 위무일이 입을 열었다. "무엇을 바라느냐?" 건조한 목소리였다. "저를 도와주세요." 담청이 그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억할 것이다. 나는 너를 이미 한 번 도와주었음을... " " .... " 담청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되었지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여자의 눈물을 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위무일은 짜증이 났다. 단호하게 떠나지 못하는 자신이 짜증났고 총채의 일을 돕겠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짜증났다. 총채의 일을 돕는 것이 별 대수인가? '그랬었지.' 문제는 이 여자였다.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왕국(王國)을 꿈꾼다. 칼을 잡고 있었으므로 위무일의 꿈은 당연히 강호의 패자(覇者)였다. 조양인이 남긴 무공비급 철경(鐵經)! 철경을 얻음으로써 그의 꿈은 현실에 더욱 접근했다. 그러나 머리가 크고 그가 주변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의 꿈이 결국 꿈으로 그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호반영주였던 아버지가 그에게 강조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복종과 절제, 그리고 충성! 패자가 아닌 이인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호형호제하던 백승명에게 그 같은 덕목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거칠었고 꿈이 컸다. 한 순간 반역을 생각했다. 아버지, 어머니를 죽이고 그를 아껴 주던 수룡왕, 백승명, 추운객을 죽이면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허공에 대고 몇 번 칼질을 해 보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장강을 떠날 것을 생각했다. 자신의 성품이 주머니 속의 추(錐)로도 남지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앞에 그 여자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좌절의 끝에 만난 여자! 그래서 더욱 사랑했다. 그 여자로 인해 세상은 그런 대로 살만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떠난다고 했다. 위무일은 몰랐었다. 그 여인에게도 꿈이 있었음을... 그녀의 꿈은 이인자의 아내로 머물 수 없는 꿈이었다. 회갈색 하늘! 장강에 피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끝없는 부유... 위무일은 그 여인으로 인해 겪었던 좌절의 고통을 질근질근 씹었다. 하지만 증오는 생각처럼 쉽게 끓어오르지 않았다. 휭! 새벽을 여는 바람이 불었다. 시린 어깨, 계절은 변해 가고 있었다. 가을! '영남에서는 그 정취를 느끼기가 쉽지 않았었지. ' 그가 까닭 없는 실소를 흘렸다. 언뜻 떠오른 것은 악양루의 울긋불긋한 잎들이었다. '그 나무에는 칼자국이 있지. 내가 겪은 좌절의 깊이 만큼 그어진 상처...' 하지만 그 나무는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잎을 피우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여자는 항상 나를 무력(無力)하게 하는구나.' 철썩! 위무일은 서성거렸고 방향타 잃은 배는 제멋대로 출렁거렸다. 담청은 입술을 깨문 채 동정호의 물만 늘였다. 산고는 팔짱을 낀 채 그들을 요기롭게 지켜보고 있었고 먼발치에 선 주숙예와 장능 등은 제 각각의 표정들이었다. 긴 시간 같기고 하고 짧은 시간 같기도 한 시간의 흐름 속에 희뿌옇게 날이 밝아 왔다. 화톳불의 불씨는 점차 꺼져 가고 배를 만드는 목수들이 그들을 힐끔거리며 하루 일을 준비했다. '끝장을 내야 한다.' 위무일은 가슴을 폈다. 그러나 생각의 갈피는 제멋대로 풀어져 종내 위무일은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곳에 서 있는가를 모를 정도였다. 전혀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것도 괜찮았다. 영남에서는 태반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기 때문이다. 목수들이 조심스럽게 화톳불을 살리며 아침거리를 준비할 때였다. "어이!" 새벽의 정적을 누군가가 깼다. "어디로 갔는가 했더니 여기에 있었구려." 손을 번쩍 들고 다가오는 자는 엽광이었다.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까? 아무래도 총채 일이 마음에 쓰이신 모양이지요?" 첨벙! 그가 나룻배를 향해 걸어 들어왔다. "소영주! 소영주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총채는 영주의 피와 땀이 베인 곳이라고... 한 번만 더 저들의 청을 들어줍시다." 엽광이 담청의 옆에서 흐느적거리는 줄을 어깨에 맸다. 그가 호변으로 나룻배를 끌었다. 수채의 수하들이 우르르 나룻배를 둘러쌓다. 담청은 얼굴을 씻고 물 속에서 걸어나왔다. 위무일의 눈길이 무심하게 그녀를 쫓았다. * * * 탁자에는 날카롭고 섬세한 연장들이 면포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노인이 탁자 위에 목판(木板)을 깔고 굵직한 소뼈를 놓았다. 귀밑의 수염이 턱까지 내려온 노인이었다. 노인은 그가 다루는 연장들과 다르지 않았다. 왜소한 몸집, 그러나 전신에서 뻗는 날카로운 기운은 곁에 서기만 해도 살이 벨 정도였다. 카칵! 노인이 칼로 소뼈를 조각 냈다. 소뼈는 잠깐 사이에 수 십개의 골편(骨片)으로 나누어졌다. 사각! 사각! 노인의 손에서 골편들은 가는 침(針)으로 변했다. 우골침(牛骨針)! 노인이 우골침을 소매에 넣으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그의 뒤에는 냉막한 인상의 매부리코 초로인이 서 있었다. 만로방 남뇌로 회주, 문회! 이미 불바다가 된 남창분회를 거쳐 개봉에 이른 그였다. 그가 노인의 등뒤에 대고 깊게 머리를 숙였다. "방주, 이미 소식이 전해졌을 줄 압니다." "들었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소뼈를 다시 찾는 노인. 만로방주 금반수, 주황! 전신의 날카로운 기도만 없다면 공방(工房)을 지키는 늙은이에 딱 어울릴 노인의 이름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죽여야지!" 쓱! 쓱! 주황이 소뼈에 묻은 살점과 혈흔을 깎으며 말했다. "전보다 강했으면 강했지 약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미 본 회(會)의 삼 개 분회가... " "알고 있다." 주황이 소뼈를 깎던 칼을 뚝 멈추며 말했다. "누구를 보내실 작정이십니까? 놈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개의 노회(路會)는 움직여야... " "그놈 참 말이 많아졌구나. 네놈도 늙어 가고 있음이야." 주황이 칼로 소뼈를 후려쳤다. 소뼈가 골심(骨心)을 드러내며 뚝 부러졌다. "죄송합니다. 방주! 사안이 워낙 중대해서... 개봉 총단이 불타던 때를 잊지 않으셨지요?" "그런 기억은 왜 들춰내느냐? 방정맞은! 쯔쯔쯔... " 주황이 혀를 찼다. "네놈은 남뇌로나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될 일이야. 마타룡, 그놈은 젊은 놈들에게 맡겨 두고. 마타룡, 그놈을 만나면 내뺄 생각이나 해! 또 다시 오랜 동료 한 명을 잃기 싫음이다. 나와 그 만큼 고생했으니 끝까지 살아 이제 그 대가를 받아 가야지." 콱! 그가 칼로 소뼈를 찍어 길게 가로로 갈랐다. 문회는 코끝이 찡했다. 솔직히 아직까지 길 위를 떠돌게 하는 주황의 처사에 대해 문회는 섭섭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금 던진 주황의 한 마디는 문회의 섭섭함을 흔적도 없이 지우고 있었다.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어딘가 달라도 다르다. 주황에게 사람이 끓는 이유도 그가 술수로만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탕백기(湯魄騎)를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주황이 마타룡에 대한 관심을 끊어라고 했으나 문회는 끊을 수가 없었다. 만로방의 향후가 걸린 문제였다. 따라서 문회는 마타룡에 대한 명확한 해법을 듣기 전에는 남뇌로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뒤가 찜찜했기 때문이다. 탕백기는 만로방의 최정예들이 모인 별동대(別動隊)다. 주황이 특별히 탕백기를 만든 이유는 호반영채에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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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탕백기는 호반영채와의 일전에서 시원한 결과를 가지고 오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나마 탕백기가 있었기 때문에 만로방은 좌충우돌하는 호반영채의 공세를 막아냄이 가능했다. "탕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