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10편 (10/20)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본문 바로가기

[무라카미 하루키]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10편 (10/20)

💬 0 👁 1
☰ 목록
책갈피와 음성 읽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가 <레이더스>나 <블레 이드 러너>란 제목을 언뜻 들어서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너무 불친절한 것 같다.
하기야 <레이더스>처럼 '잃어버린 성궤' 따위의 제목이 붙어 있어서 오히려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된 예도 있긴 했지만.
최근에 이해가 잘 안 갔던 것은 진 와일더와 리처드 프라이어가 나온 <스타 크레이지>라는 영화였다.
원제는 'Star Crazy'가 아니라 'Stir-crazy'였다. 'Stir-crazy'란 게 어떤 뜻인지 이해가 갑니까? 나로 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 사전을 펼쳐 보았더니(작은 사전 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형무소에 있어서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뜻이었다.
물론 속어다.
일반적인 일본인들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내 도 이해 못할 듯한 까다로운 말을, 그래도 영화 제목으로 공개하는 일을 삼가해야 하는 건 아닐까? 게다가 발음 탓으로 <스타 크레이지>라는 제 목을 들으면 누구든지 'Star Crazy'로 생각하고 말 테니까, 이건 배급 회사의 불친절 내지는 직무 태만이다.
바로 이럴 때에 수완을 발휘해 강 렬한 제목을 붙여서 왕창 돈을 벌어야 당연한 게 아닐까? 옛날 사람이라면 <얼빠진 형무소 소동> 같은 제목을 붙였겠지만, 이래 서는 아무래도 구닥다리 같으니까 <형무소 파라다이스>라든가 <웃기는 탈옥>쯤으로 해두면(물론 예를 들자면 말이다), 이건 코미디고 게다가 형무소 얘기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걸 <스타 크레이지> 라고 해버리면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옛날 사람들은 정말 성실하게 제목을 번역해 붙였다.
너 무 지나칠 정도로 성실해서 원제와 번역한 제목이 잘 연결되지 않아 문 제였지만, 제법 그 나름대로의 느낌이 있었다.
예를 들면 <잇 해픈드 인 브루클린>이 <뒷골목 천국>으로, <레크리스> 는 <무궤도 행진곡>으로, <로열 웨딩>이 <연애 준결승전>으로 재미있게 번역되었다. <연애 준결승전>이 도대체 뭘 말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극장에 한 번 가볼까 하는 기분이 든다.
이 영화는 뜨뜻미지근하지 않고 아주 밝은 연애 영화랍니다, 라는 메시 지가 제목에서 바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현재 그런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성인 영화 전문 업자로, 가령 최근작으로는 <리퀴드 애세츠>가 <슈퍼오나도르 한 코>로, <사운드 오브 러브>는 <돌비 아크메 고인>이라는 황당한 제목을 내걸고 개봉되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 '한코'라는 말을 생각해 낸 것일 까? 내 생각에는 영화 배급 회사에서 '성'이라든가 '음'이라든가 '범'이라 든가 '강'이라든가 '유'라든가 '발'이라든가 '액' 같은 글자들을 써놓은 카드를 책상 위에 잔뜩 늘어놓고, 사원이 그중에서 대충 몇 장 뽑아서 조합하는 조어 작업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성유'라든가 '발범' 이라든가 말이다. '범음 준결승전' 같은 것도 웃긴다.
매일 이런 것만 생각하면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을까.
머리가 이상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성에 굶주리게 되지 않을까 싶다.
글쎄, 얘기가 좀 뒤죽박죽이 되었지만, 말하자면 그럴싸하게 제목을 붙인 영화는 매우 재미있고 인상적이라는 것이다.
팝 뮤직 세계에서도 옛날에는 <외로운 소년병>이라든가 <어린 애가 아 니에요>라든가 <딸기의 짝사랑>같이 가벼운 제목을 붙였었는데, 비틀스 가 출현한 이후로 그런 식의 제목이 눈에 띄게 사라져 섭섭하다.
어째서 <딸기의 짝사랑>이냐 하면, 낸시 시나트라가 바로 그전에 부른 노래가 <레몬의 키스>였기 때문이다. '레몬'이 히트를 치자 "그럼, 이번에는 '딸기'로 가자"라는 식이었던 것 같다.
그런 건 나도 굉장히 좋아한다. '포도의 고백'이라든가 '사과의 웨딩'이라든가 '드릴게요, 오렌지'라든 가 '도둑 참외'라든가 그런 거 말이다.
요즘 비교적 마음에 드는 것은 레이 파커 주니어의 <아이 스틸 캔트 겟 오버 러빙 유>라는 노래로, 번역된 제목은 <아이 스틸 사랑하고 있 어>였다.
이런 식의 제목 붙이기는 진짜 멍청하고 품위 없는 짓이긴 해 도, 외우기 쉬우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목의 대략적인 뜻과도 잘 맞았다.
제목의 번역이라면 이런 식으로 그냥 적당히 하는 게 좋지 않을 까? 홀 앤 오츠의 <세이 잇 이즌트 소>라는 제목을 들어 봐야 '뭐, 그런 게 있나 보지' 하는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그보다는 "다음에 띄워 드릴 곡은 홀 앤 오츠의 <포도의 고백>입니다"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 까? 원리적으로 완전한 번역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고,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될지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팝 뮤직이니까 말이다.
재즈 스탠더드 넘버에 이르면 상황은 더욱 어이없어진다.
롯폰기의 재 즈 클럽 같은 데 가면, 여자 가수가 혀를 마구 굴리면서 "다음 곡은 <아 이 게스 아이 윌 해브 투 행 마이 티어즈 아웃 투 드라이>입니다"라든 가, "<스프링 윌 비 어 리틀 레이트 디스 이어>를 부르겠습니다"라고 한 다.
그런 건 <눈물에 잠겨서>라든가 <늦은 봄>이라든가로 적당히 바꿔 놓으면 서로 얘기가 빨리 통하지 않을까 싶지만, 좀처럼 그렇게 되지도 않는 모양이다.
게다가 솰라솰라 영어로 떠드는 쪽이 어쩐지 더 재즈답 다는 풍조도 있으니, 참 난감하다.
같은 곡을 팝 가수가 부르면 <내 마 음에 드는 것>인데, 재즈 컬렉션이 연주를 하면 <마이 패이버릿 싱>이 되고 만다.
완전한 차별이다.
옛날 사람들은 외국 노래라도 <어떻게 전 할까요>라든가 <달빛의 값은 천금>이라는 좋은 제목을 붙였다.
그러니 요즘이라고 해서 그게 불가능할 리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재즈 팬 이고 영어 소설을 번역하고 있는 인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 게스 아이 윌 해브 투 행 마이 티어즈 아웃 투 드라이' 같은 말을 절대로 단 숨에 줄줄이 말할 수는 없다.
짐 모리슨을 위한 '소울 키친'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전반에 걸친 이른바 '혁명의 시대'에 배출된 무수한 록 밴드 중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밴드 는 대체 몇 개 정도나 될까? 영화 <우드스톡>을 지금 다시 상영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흥분할 수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이 지나가 버렸다.
그 시절에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 고 몸을 꿰뚫는 것만 같던 수많은 것들을 10년도 넘게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되돌아보니, 그것들은 단지 겉치레만 번지르르한 약속 따위에 지나 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요구했고, 그리고 주어졌다.
그 러나 우리가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결과 주어진 대부분 의 것들은 유형을 따르게 되었다.
유형으로서의 문화를 공격해야만 할 반 문화가 유형화되었다.
반 반 문화가 일어나고, 반 반 반 문화까지 일 어나게 되었다.
그러고는 당연히 '혁명'은 끝이 났다.
만약 1969년이나 1970년에 세계 어딘가의 대도시(샌프란시스코나 로스 앤젤레스, 아니면 도쿄든)가 폼페이처럼 화산재에 묻혀 버렸다면 그 유 적지는 상당한 구경거리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인 광경이 되 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화산 폭발이 일어나지 않은 채 모든 것은 시 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반 문화라는 발상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유형화를 거부하려는 인간이란 눈 씻고 찾아봐 도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시도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 을 모두들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아빠진 사회에서는 유형 속 에 이미 반유형이 포함되어 있고, 반유형 속에 이미 유형이 포함되어 있 다.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남겨진 유일한 길은 갑작스런 역전을 인정 하고 반어적으로 '유형의 왕'이 되는 것뿐이다.
그런 번잡한 사회 속에서 짐 모리슨은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소울 키친(soul kitchen) 속으로 돌아가 버렸다.
짐 모리슨은 1971년 7월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도 이 른 그의 죽음을 시대의 죽음과 겹쳐 생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 다.
모리슨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는 여러 사람이 죽었다.
지미 헨드릭스 가 죽었고, 제니스 조플린이 죽었고, 존 콜트레인이 죽었다.
그리고, 그 들의 죽음은 저마다 각기 다른 크기의 유적을 남겼다.
죽은 자를 칭송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젊어서 죽은 사람은 더 더 욱 그렇다.
죽은 자는 배반하지 않고 반격도 하지 않는다.
나이도 먹지 않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지지도 않으며, 배로 안 나온다.
그들은 그저 조용히 완전하게 죽은 상태로 있을 뿐이다.
설령 당신이 그들의 죽 음에 대해 신물을 내며 잊고 말았다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다.
단지 그 대로 잊어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끝이다.
잊혀졌다고 해서 그들이 당신네 집 대문 앞에 문을 두드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암흑 속에 서 단지 고요히 있을 뿐이다.
그렇다.
죽은 자를 칭송하는 일은 너무나 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온갖 생각을 뛰어넘어, 죽은 자를 칭송하며 그들의 흔적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꺼림칙함을 뛰어넘어, 짐 모리슨의 음악은 지금까 지도 나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다.
그가 남긴 레코드 중 정말 좋았던 서 너 장의 음반은 그 이후에 나온 어떤 록 뮤직 레코드보다도 훌륭하고, 독창적이며, 충격적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한테는 최고의 LP인 <더 도어즈>보다 전율적인 음반이 없고, <스트레인지 데이즈>보다 아름 답고 심플한 음반이 없으며, <L.A.우먼>보다 황량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음반은 없다.
내가 처음 들었던 짐 모리슨과 더 도어즈의 레코드는 물론 <라이트 마 이 파이어>였다.
1967년의 일이다.
1967년에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그 때는 고등 학교를 나와 대학에도 입시 학원에도 다니지 않고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록큰롤을 듣던 때다.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그 해에도 수많은 히트송이 나왔고, 그리고 사라졌다.
그러 나 <라이트 마이 파이어>라는 곡만은 변함없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거 칠기 짝이 없고 폭력적인 보컬과 전주의 주술적인 오르간 음색은 언제까 지나 내 뇌리 속에 박혀 있었다. <마음에 불을 붙여라>라는 일본어 제목 은 너무 부드럽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라이트 마이 파 이어'였지 그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Come on baby light my fire Come on baby light my fire Try to set the night on fire 자 그대, 나에게 불을 붙여 줘 자 그대, 나에게 불을 붙여 줘 이 밤을 확 불살라 버리지 않겠어? 나는 이곡의 가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아하게 '내 마음에 불을 붙여서'라든가 '온밤 내내 타오른다'가 아니라 그것은 좀더 물질적 이고 육체적인 것이다.
그는 밤 자체에, 혹은 육체 자체에 불을 붙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묘하고 직설적인 감각이 바로 짐 모리슨 이라고 하는 록 싱어의 생리다.
이 곡의 작사와 작곡은 대부분 기타를 맡은 로비 크리거가 했는데도 불구하고, 짐 모리슨의 생리는 압도적이고 카리스마적으로 이 노래를 완 벽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건 짐 모리슨 이외의 가수가 노래하는 <라이트 마이 파이어>의 버전을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호세 펠리치아 노라든가 스티비 원더.
그들의 노래는 해맑고 아름답다.
잘하면 누군가 의 마음에 불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짐 모리슨말고 대체 누가, 육체 그 자체에 직접 불을 붙일 수 있을 것인가? 믹 재거라 해도 그건 무리다.
나에게 있어서 <라이트 마이 파이어>는 나에게 있어서의 1967년과 너 무나도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낡은 커튼처럼 잡아뜯어서 1967년의 밤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면 나는 꼭 그렇게 했을 것이다.
1967년은 그런 해 였다.
짐 모리슨은 본질적으로 선동자였다.
그보다 더 평범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될 만큼 평범하고 우직한 군인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제임스 (짐) 더글라스 모리슨은 록 싱어가 됨에 따라 부친을 상징적으로 살해하 고, 모친을 상징적으로 범했으며, 자신의 과거를 불태워 버렸다.
데뷔 당시 그는 성장 배경을 묻는 말에 단지 '고아'라고만 대답했다.
그는 스 스로를 선동해서 짐 모리슨이라는 이름의 신생아에게 신성한 혼을 부여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한 선동 없이는 짐 모리슨은 짐 모리슨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때문에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선동의 대가는 날마다 커져만 갔다.
마침내 더 이상 대가를 치를 수 없을 정도 로.
그리고 그 시절에 우리는 짐 모리슨이었다.
짐 모리슨이 LSD(역주:강 력한 환각제)와 코카인으로 자신의 머리를 선동하고, 버본 위스키와 진 으로 내장 기관을 선동하고, 바지 지퍼를 열고 페니스를 꺼내 관중을 선 동할 때, 우리는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공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짐 모리슨이 죽었을 때, 우리 속의 짐 모리슨도 함께 죽었다.
존 레논도, 믹 재거도, 보브 딜런도 짐 모리슨이 남긴 빈자리를 이어받 을 수는 없었다.
20년이라는 세월도 그 공백을 메우기에는 충분치 않았 다.
1971년에는 1983년 같은 해가 정말로 나에게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1983년은 실제로 아무런 감동도 없이 내 위로 내 려왔고, 나는 지금도 짐 모리슨과 더 도어즈의 레코드를 듣고 있다.
나 는 이제 서른세 살이고, 여전히 밤에 불을 붙일 수 없다.
자 이제 문닫을 시간이야 가야만 해 밤새도록 여기에 있고 싶어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고 가로등은 공허한 불빛을 흔들고 있지 게다가 내 머리 속은 완전히 미쳐 버린 모양이야 이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뻔하잖아 너의 소울 키친에서 하룻밤 자게 해줘 그 촉촉이 젖은 스토브로 나를 따뜻하게 해줘 짐 모리슨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소울 키친'으로 사라지고 나서 12년 이 흘렀다.
그리고 그의 노래는 지금까지도 스테레오 세트 주위에 살이 나는 냄새를 감돌게 한다.
그가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와서 문을 두드릴 것만 같다.
어이, 난 전설 따위가 아니야, 라고.
그래, 짐 모리슨은 결코 전설 따위가 아니다.
전설로도 짐 모리슨의 빈자리를 메울 순 없는 것이다.
카레라이스에 나물무침 같은 회의 가끔 텔레비전 야구 중계 같은 걸 보다 보면, 경기 후의 인터뷰에서 투수에게 "오늘의 투구가 100점 만점에서 몇 점 정도일거라고 생각하십 니까?"라고 묻는 아나운서를 보게 되는데, 대체 그런 질문을 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 대개 그런 질문을 하는 아나운서는 투수가 "글쎄요, 90점 정도일까요"라고 하면, "아아, 그렇습니까? 90점입니까?" 하는 식으로 얘기를 끝내 버리고 만다.
얘기는 거기서 끝나고, 90점이라는 자기 평가 가 과연 어떤 기반과 체계 위에서 성립된 것인가 하는 분석까지는 가지 않는다.
이래서는 답안지를 받고 어디가 틀렸는가를 반성하지도 않고 "와아, 90점이야, 90점" 하고 떠들어대는 초등 학생과 하나 다를 바가 없잖은가.
도대체 무엇이 100점 만점인가 하는 설정부터가 애매한데도, "글쎄요, 90점 정도일까요"라는 소리를 듣고, "아아, 그렇습니까?"하고 이해를 하 는 쪽이 더 이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봐야 스포츠에 불과하니까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는 게 촌스럽다면 뭐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하기 야 인터뷰 시간도 짧고, 본인이 90점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됐지 싶은 생 각도 든다.
그러나, 프로 야구 투수 중에도 자기 평가에 엄격한 사람과 느슨한 사 람이 있을 것이다.
개중에는 "이기면 100점, 지면 0점!"이라고 하는 단 순한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90점입니다", "그렇습니까?"라는 대화 속에서 뭘 얻는 건 상당히 무리일 테고, 아나운서 역시 그것이 무 리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알면서 그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100점 만점이라면 몇 점일까요?"라고 묻는다 면, 그것은 이미 안일함이나 단순함이 아니다.
그저 무의미한 소모에 불 과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점수 평가 방식의 질문은 질문자에게는 상당히 편리한 모 양인 듯, "100점 만점이라면 당신의 남편은 몇 점일까요?" 하는 종류의 질문이 항간의 잡지-특히 여성지-에 자주 등장한다.
대답하는 쪽도 "글 쎄요...난처하군요.
65점쯤일까요"하고 난감해 하면서도 우직스럽게 답 변한다.
그런 기사를 읽으면 나는 항상 어리둥절해지는데, 과연 65점 남편이란 어떤 남편일까? A씨네 남편은 '집안일은 잘 도와 주지만, 섹스가 별로여 서 65점'일지도 모르고, B씨네 남편은 '섹스는 무턱대고 짐승처럼 세게 하지만 집안일을 도와 주지 않아서 65점'일지도 모른다.
C씨네 남편은 '얼굴은 못생겼지만 마음이 착하니까 65점'일지 모르고, D씨네 남편은 '너무 사랑한 나머지 왠지 두려워서 65점'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A씨와 B씨와 C씨와 D씨네 남편은 모두 65점이지만 그 방향성 도 질도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65점이라는 숫자로 바꿔 버리 면, A씨네 남편도, B씨네 남편도, C씨네 남편도, D씨네 남편도 그저 '65 점'이라는 따옴표 안에 한데 묶이고 만다.
그러니 그런 질문이나 대답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설문 조사 중에는 왠지 찝찝하고 무의미한 것이 많다.
나도 한번 "당 신의 행복도는 10점 만점 중 몇 점입니까?"라는 끔찍한 질문을 받고 난 감했던 적이 있다.
그런 걸 갑작스레 물으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잖 은가? 그것은 마치 "10점이 만점이라면 남극 대륙의 존재는 당신에게 몇 점입니까?" 하는 질문과 똑같다.
남극 대륙은 좋든 싫든 존재하는 것이고, 좋아하니까 이렇고 좋아하지 않으니까 저렇다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펭귄이 있으니까 8점'이라든가 '추운 건 싫으니까 2점'이라는 식으로 평가를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쯤 되면 완전히 무의미해진다.
현재 상황이라는 것도 그렇다.
당연히 여기 있어야 했기에 여기에 있는 거니까, 이런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하 므로 여기에 있다'라고 평가할 도리밖에 없다.
펭귄이나 추위라는 건 개 별적인 측면의 속성일 뿐, 총체로서의 상황과는 별 관계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모르겠다'라든가 '뭐라 말할 수 없 다'라든가 '대답하고 싶지 않다'라고 답하기로 했다.
물론 여태까지 여 기에 쓴 얘기를 꺼내며 '모르겠다'라는 답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세세 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얘기가 너무 길어질 염려가 있고, 무엇보다 질문자는 그런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원하 는 것은 '6점'이라든가 '8.5점'같은 단순한 수치다.
그래서 나는 설문 조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신문의 여론 조사 결과 따위를 보면, '모르겠다'라든가 '대답하고 싶 지 않다'라고 답한 사람들이 대략 5퍼센트 정도씩 있는데, 나는 그런 사 람들의 기분을 잘 이해한다.
가령, 당신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신뢰할 수 있습니까? 다음 중에서 골 라 주십시오.
(1) 신뢰할 수 있다 (2)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 (3) 그다지 신뢰할 수 없다 (4) 신뢰할 수 없다 (5) 모르겠다 라는 설문 조사를 받으면 (5)를 고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미국이든 일본이든 니카라과든, 신뢰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신뢰할 수 없는 부분 도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런 연유로 해서 나는 이런 질문에 대해 '모 르겠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신뢰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설문 조사나 여론 조사에 대해 죄다 '그런 건 모르겠다'라든가 '뭐라 말할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다.
여론 조사의 원 그래프에 '모르 겠다'는 대답이 85퍼센트를 점유하고 있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다소 불안한 느낌이 들 테고, 그런 회의적인 사회에 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아마 회의라는 것은 카레라이스에 나 물무침을 곁들인 정도의 비율로 존재하야 건전할 것이다. '토끼정' 주인 나는 나의 단골집을 소개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짓을 하 면 왠지 모르게 '잘난 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섣불리 소개를 해서 가 게가 붐비게 되어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토끼정'의 장소와 전화 번호를 여기에 쓰지 않기로 하겠다. '토끼정'은 우리 집 근처에 있고, 나는 종종 이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손님이 열 명만 들어가면 꽉차 버릴, 카운터만 달랑 있는 작은 집 인데 꽉차는 일이 거의 없다.
인테리어도 극히 평범하고, 바깥에는 간판 도 달려 있지 않다.
입구 옆에 '서양 정식,토끼정'이라는 작은 팻말이 붙어 있을 뿐이다.
💬 한 줄 댓글 0
비회원 · 이 글에 하루 1개만 등록 가능
HTML/스크립트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댓글은 최대 120자이며 페이지를 이동하지 않고 바로 등록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Copyright © webstoryboard.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