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이고... 화 장지고..." 하고 늘어놓으면서 점검해야 할 때는 비참하기 짝이 없다. 나는 역의 개찰구를 지날 때마다 나처럼 주머니를 몽땅 뒤집어 전철표 를 찾고 있는 사람이 없나 둘러보지만, 그런 모습은 거의 발견하지 못한 다. 보통 사람들은 전철표 같은 걸 잃어버리지 않는 걸까? 무엇보다 여자랑 데이트를 할 때 전철표를 잃어버리면 참 난감하다. "아, 잠깐, 잠깐만 기다려"하고 하며 기다리게 해놓고 개찰구 옆에서 뒤적이다 보면, 동행한 여자의 얼굴 표정이 기묘하게 변해 가는 걸 느끼 게 된다. 정말 서글픈 일이다. 나와 여자와 요즘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여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매우 힘든 일인 것 같다. 나는 지금 서른네 살이고, 뭐 보통 사람만큼은 여자 와 사귀어 본 경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여자에게 친 절을 베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한다. 미리 말해 두지만, 그저 단순하게 여자에게 친절을 베풀기란 별로 어 렵지 않다. 집까지 바래다 준다든가 짐을 들어 준다든가, 마음에 드는 선물을 한다든가 옷차림을 기억해 준다든가 하는 일은 고등 학생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일을 하면서도 상대 방에게 "하루키 씨는 참 친절하시네요"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끔 하는 테 크닉이다. 왜 여자에게 "친절하시네요"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되는지 를 설명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이런 느낌은 웬만큼 나이를 먹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나 잘났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도 예전에는 여자에게 친절하려고 애쓰다 실패만 잔뜩 한 사람이다.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열일곱 살 때 일로, 그 무렵에 나는 매일 한큐센을 타고 고베에 있는 학 교까지 다녔는데, 어느 날 아침 한큐 아시야가와 역에서 종이 봉투가 전 철 문에 끼여 당황해 하고 있는, 굉장히 귀엽게 생긴 여학생을 발견했 다. 그래서 곧장 달려가 "잡아당겨 드릴까요?"라고 했더니, "어머, 고마 워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내가 힘껏 잡아당기자 종이 봉투가 둘로 짝 찢어지면서 내용물이 선로 위에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면 무척 난감해지게 마련이다. 더 이상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 음, 미안합니다" 하고 뒤처리는 역무원에게 맡기고 도망쳐 버렸다. 벌써 17년이나 지난 얘기지만, 그때의 고난 여자 고등 학교의 여학생, 정말로 미안해요. 악의는 없었어요. 내 학창 시절의 아르바이트는 내 학창 시절이라면 이미 10년도 더 된 이야긴데, 시간당 평균적인 아 르바이트 수당은 대충 다방의 평균적인 커피 값과 같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60년대 말을 기준으로 150엔 정도였다. 아마 하이라이트 담 배가 80엔, 소년들이 보는 잡지가 100엔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레코드를 잔뜩 샀기 때문에, 하루 반만 일하면 LP 한 장을 살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일했다. 지금은 커피가 300엔인 데 비해서 아르바이트 수당은 시간당 500엔쯤 되니까 상황은 조금 달라진 듯싶다. LP라면 하루만 일하면 두 장 정도는 살 수 있다. 숫자만 보면 최근 10년 동안 우리의 생활은 편안해진 듯싶 다. 그러나 생활 감각에서 본다면 그렇게 편안해진 것도 아니다. 옛날에 는 가정 주부가 부업 전선에 나서는 일도 별로 없었고, 샐러리맨을 상대 로 한 고리 대금업도 없었다. 숫자라는 것은 참으로 복잡하다. 그러니까 총무처 통계국 같은 곳은 도저히 신용할 수가 없다. GNP도 솔직히 말해서 의심스럽다. 그야 GNP라는 게 신주쿠의 니시구치 광장에 덩그러니 놓여 있어서, 만 지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만질 수 있다면 나도 신용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실체가 없는 것 따윈 절대로 믿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다케무라 겐이치라든가 다나카 가쿠에 같은 사람들은 실 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숫자의 그런 미심쩍은 점을 제대 로 간파한 뒤에, 적절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숫자라면 대충 수첩 한 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학창 시절에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산 레코드는 지 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으며,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듣고 있다. 무엇이 든 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수라든가 양이 아니라 질이다. 연달아 만나는 이혼한 친구 요즈음 어찐 된 일인지 이혼한 친구들만 연달아 만났다. 그러면 참 난처하다. 오래간만에 만난 상대라면 얘깃거리가 별로 없어 서 "하는 일은 좀 어때?"라든지 "지금 어디 살고 있어?"라는 말로 시작 해서, "부인은 잘 지내?" 하는 말에 이르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건 딱히 친구 부인의 동향을 알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니라-남의 부인 이 어떻게 지내든 알 바 아니다-그저 세상살이 얘기나 날씨 인사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어어, 그저 그렇지 뭐" 하는 대답을 기대한다. 그럴 때에 "사실은 이혼했어" 같은 소릴 들으면, 나는 완전히 할말을 잊 게 되어 곤란해진다. 물론 말한 친구도 난감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혼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혼의 곤란 함은 이쪽이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도통 모르겠다는 점이다. 결혼 이나 출산이라면 무엇이 어찌 되었건 "그것 참 잘됐군" 하면 되고, 장례 식이라면 "힘들었겠군" 하면 된다. 그러나 이혼에 관해서라면, 해줄 적당한 말이 없다. 헤어져서 다행일 지도 모르고, 도무지 그런 건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속 시원하겠어"라는 것도 왠지 모르게 무책임하고, "아아, 부 럽구먼" 하는 건 너무 경박하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한 얼굴을 하고 "그 것 참..." 하는 것도 분위기가 완전히 침체되어 버리므로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뭐라고, 정말? 으음...' 하는 느낌이 되어 버린다. 상 대편도 똑같이 '그렇다니까. 으음...' 하는 느낌이다. 그런 일이 요즘 서너 번이나 계속되다 보니 완전히 지쳤다. 이렇게 이혼하는 사람이 늘고 있으니 <관혼상제 예절> 같은 책에 이혼 항목이 첨가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쓰는가'와 '어떻게 사는가' 이따금 앞으로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는 젊은이들에게서 "문장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는 질문을 받는다. 나 같은 사람한테 그런 걸 물어 봐야 아무 소용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하여튼 그런 일이 있다. 문장이라는 것은 '자, 써야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제대로 써지는 게 아니다. 먼저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내용이 필요하고,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부터 자신에게 걸맞는 내용과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천재가 아닌 한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 딘가에서 기성 작품의 내용이나 스타일을 빌어와 적당히 넘기게 된다. 기성 작품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해되기 쉽기 때문에, 재주 많은 사람이라면 "와, 잘 쓰는데" 하는 소리를 곧잘 듣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본인 자신도 그렇다고 느끼게 된다. 좀더 칭찬을 들을 수 있게 하 려고 한다-이런 식으로 해서 망가진 사람을 나는 몇 사람이나 보았다. 문장이란 양적으로 많이 쓰면 확실히 좋아진다. 그러나 자신 속에 곧은 방향 감각이 없는 한, 그 능숙함은 '재주'로 끝나고 만다. 그러면 그 방향 감각은 어떻게 하면 갖춰지는 것인가? 요는 문장 운운 하는 건 제쳐 두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은 의미다. 어떤 식으로 여자를 꼬실 것인가, 어떤 식으로 싸 울 것인가, 초밥집에 가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 뭐 그런 거다. 대충 그런 짓을 해보고, '뭐야, 이런 거라면 딱히 문장 같은 걸 일부 러 쓸 필요도 없잖아' 하는 생각이 들면 더없이 행복할 테고, '그래도 아직 쓰고 싶은걸' 하는 생각이 들면-잘 쓰고 못 쓰고는 별도로 하고-자 기만의 독특한 문장을 쓸 수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앞날의 일' 당연한 얘기지만, 앞날은 예측할 수 없다. 절대로 예측할 수 없다. 내 가 어렸을 때 일인데, 하루는 라디오를 듣고 있자니 아나운서가 "저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록 음악이 너무너무 싫습니다. 그런 건 빨리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습니다"라는 투서를 읽어 주었다. 당시는 1950년대 후반으로 엘비스의 전성기였다. 아나운서가 거기에 "그렇군요. 이런 시끄러운 록 음악은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군 요"라고 동의했다.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런가? 이런 록 음악은 곧 사라져 버리는 걸까?' 하고 아무 의심 없이 믿었다. 그러나 엘비스는 살아 남았고, 롤링 스톤즈는 훨씬 더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해 몇천만 달 러를 벌어들였다. 그리고 이것도 그 무렵의 일인데, 어느 잡지에 "장래에 전자 두뇌는 일반적으로 보급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게재된 적이 있다. 대답은 노 (No)였다. 이유는 "인간의 두뇌에 필적할 만한 전자 두뇌를 만들려면 빌 딩 정도만한 크기가 될 테고(옛날 얘기), 그런 것이 일반에게 보급될 리 가 없으니까"였다. 나는 그때도 순진했기 때문에 머리 속에 빌딩 정도만한 크기의 전자 두뇌를 떠올리고, 이래서야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서류 가방에 사무용 컴퓨터가 들어가는 시대다. 그것과 엇비슷한 일들은 여태까지 수없이 있었다. 나는 꽤나 집요한 성격이라 그런 일들을 하나하나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웬만한 일들은 믿지 않는다. 제일 위험한 건 전문가의 말, 그 다음으로 위험한 것은 그럴듯한 구호 다. 이 두 가지는 일단 믿지 않는 게 좋다. 나도 그런 것에 굉장히 속으 면서 살아왔다. 소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소설이란 무엇인가 따위를 생각 하기 전에 먼저 좋은 소설을 써야 한다. 그것이 전부다. 사기 힘들어 사지 않는 체중계 그다지 비싼 물건도 아닌데 도무지 사기 힘들어서 사지 않고 마냥 있 게 되는 물건이 있다. 내 경우에는 체중계가 그렇다. 항상 사야지 사야 지 생각은 하면서도 실제로 백화점 같은 데 가보면 디자인이 어느것 하 나 마음에 드는 게 없거나, 가지고 돌아오는 게 귀찮아서 결국은 '에이, 다음에 사지 뭐' 하게 되고 만다. 게다가 내 경우에는 60이나 61킬로그램 정도로 체중이 안정적이고, 특 별히 몸에 이상도 없어서 체중계가 꼭 필요한 게 아니라, 그저 있으면 편리한 정도다. 그러던 중 지난 가을에 어딘가에서 체중계를 받았다. 그럴 때는 굉장 히 기쁘다. 지금까지 사지 않고 버틴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체중계란 건 두 개씩 있어 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물건인 것이 다. 그래서 재빨리 그 체중계로 몸무게를 재어 보았다. 고양이 A가 3.5킬 로그램, 고양이 B가 4.5킬로그램, 내가 61킬로그램이었다. 체중계란 꽤 재미난 물건이다. 한번 재고 나면 습관이 되어 나같은 사 람은 하루에도 열 번쯤 체중계 위에 올라간다. 세밀히 관찰하면 알 일이지만, 인간의 체중은 하루에 1킬로그램에서 1.5킬로그램까지 오르락내리락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밥을 먹으면 늘고, 배설하면 줄어든다. 밤에 잠자리 에 들 때와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1킬로그램 가까이 체중이 차이가 난 다. 그리고 여름철에 1분당 200미터 정도의 속도로 5킬로미터를 달리면 500그램이 줄고, 마찬가지로 10킬로미터를 달리면 1킬로그램 가까이 줄 어든다. 하기사 이런 현상은 대부분 발한 작용에 의한 것이라, 수분을 공급하면 금방 원래의 체중으로 되돌아간다. 또 하나, 시내에 나가 업무상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나거나 하면 1킬로그램이 빠진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올 가을 나의 최고 체중은 64킬로그램, 현재는 58킬로그램이다. 기초 적인 다이어트와 가벼운 조깅을 한 달쯤 하면 5킬로그램은 금방 빠지는 모양이니 살이 쪄서 고민인 사람은 노력해 보길 바란다. 훌륭한 동물 개미 개미란 훌륭한 동물이다. 허튼소리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 다. 나는 옛날부터 개미 들여다보기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관찰을 했다. 어제도 집 근처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발 밑에서 개미 떼가 와글와글 열심히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길래 15분 정도 들여다보았다. 아시다시피 개미란 동물은 땅속에 굴을 파서 집을 만들지만, 땅을 팔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파낸 흙을 어떻게 해서 지상으로 실어 나르느냐 하 는 점이다. 영화 <대탈주>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것은 참으로 귀 찮은 문제다. 지극히 단순한 얘기지만, 모든 개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 결하느냐 하면 한 알갱이씩 앞 발로 끌어안고 지상으로 옮긴다. 상당히 고된 노동일 거라 생각되지만 개미란 동물은 일을 하는 게 천직이니까, 그냥 그렇다고 치자. 내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모래 알을 떨궈 놓는 방식이다. 무슨 소리냐 하면, 지상까지 모래 알을 날라 온 개미는 결코 그 모래 알을 가 까운 아무데다 함부로 툭 내던지고 돌아서는 법이 없다. 그런 짓을 하면 보금자리의 입구 주변에 모래산이 생기고 말아 여러 가지로 곤란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사실을 개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개미는 구멍에서 나와 30센티미터나 50센티미터쯤 기어가 적당한 곳을 가늠하여 모래 알을 떨구고는 다시 구멍 속으로 되돌아간다. 그 '가늠한다'는 느 낌이 개미의 뒷모습에 어려 있어 옆에서 보고 있으면 호감을 느낄 수 있 다. 그러나 모든 개미가 다 그런 건 아니다. 개중에는 입구 옆에 슬쩍 모 래 알을 떨구고 가는 파렴치한 놈도 있다. 개미의 세계에도 각양각색의 개미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찌 생각하면 누구나가 모래 알을 멀리 까지 운반해 가야만 한다는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구석구석까지 모 래를 흩어 놓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입구 근처에 슬쩍 내다 버리 는 놈이 있다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 개미 한 마리 한 마리가 줄곧 그런 상황 판단을 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 거라면, 역시 개미는 대단한 존재 다. 대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어디가 그렇게 좋단 말인가! 내 주위에는 어찌 된 일인지 잘생긴 남자를 밝히는 여자들이 많다. 나 이 서른이 지나 남편도 있으면서 뭘 그리 잘생긴 얼굴을 밝히느냐고 나 는 생각하지만, 마음이 약해서 그런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한다. 단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나는 그런 여자들에게 훌리오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 출판사에서 내 글을 담당하고 있는 여자도 훌리오 증후군에 걸린 환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훌리오 전에는 이브 몽땅의 팬이었다. 몽땅이 일본에 왔을 때는 아파서 누워 있는 남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현금 카드로 은행에서 몰래 2만 엔을 인출해서는, 티켓을 사 서 혼자 콘서트에 가 '이제 남편 따윈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냐'라고 생 각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래서 아마도 훌리오 증후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 사람이 최근 훌리 오 이글레시아스의 팬이 됐다. "있잖아요, 하루키 씨. 훌리오의 연간 수입은 몇백 억에, 자가용 비행 기도 갖고 있고, 별장 같은 건 한 다스쯤 갖고 있으며, 전세계에 애인이 몇십 명이나 되는 데다 훌륭한 인텔리라구요. 어때요, 부럽죠?" 하고 그 녀는 말한다. 너무도 환경이 달라서 그런 말을 들어도 부럽지 않을 뿐더러 아무렇지 도 않다. 전세계에 애인이 몇십 명이나 있다면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으 로도 골치가 아플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마누라 하나밖에 없는데도 잠 꼬대를 하면서 옛날 애인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할 정도인 데, 훌리오는 참 잘도 해내고 있구나 싶다. 꼼꼼한 성격인가 보다, 틀림 없이. 그녀 역시 만약 훌리오에게 구애를 받는다면 마음이 솔깃해질 것 같다 고 한다. 그래서 훌리오의 몇십 명이나 되는 애인 중의 하나가 되어 매 년 5,000만 엔 정도의 수당을 받겠다고, 그렇지만 한 해에 5,000만 엔을 다 쓸 순 없을 테니까 그중 1,000만 엔쯤은 지금의 남편에게 송금해 주 겠다고 한다. 이런 여자를 정숙하다고 해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 세상의 일반적인 주부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는 내 상상 력 밖의 일이다. 신문이 끼여들 틈이 없다 외국에 나가서 가장 마음이 편한 것은 신문을 읽지 않아도 되는 일이 다. 나는 일본에 있을 때도 거의 신문을 읽지 않는 편이므로 장소와는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일본에 있으면 싫든 좋든 큰 사건 등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된다. 가령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에게 격추된 사건쯤 되면 일단은 신문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럽 같은 데 있으면 현지의 신문은 읽을 수가 없고, 그 렇다고 해서 일부러 비싼 돈을 내고 영자 신문인 <헤럴드 트리뷴>을 사 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라, 정보와는 전혀 무관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 렇게 지내면 정말 편하다. 솔직히 신문 같은 것은 없어져도 조금도 불편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리스에 있을 때는 불편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난다->밥 먹는다->수영한다->밥 먹는다->낮잠 잔다->산책한다->술 마신다->밥 먹는다->잔다. 이런 패턴이 노상 반복되어 도무지 신문이 끼 여들 수가 없었다. 그리스는 정말 훌륭한 나라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전에 독일에서 한 달 간 체류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신문이란 걸 읽지 않았다. 딱 한 번 베를린행 팬암기에서 서비스로 준 트리뷴을 읽었 는데, 별다른 사건도 없어서 '그런가, 미국이 그레나다를 침공했나'라든 가 '론과 야스가 손을 잡았군'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보다는 독일의 젊은이들이 모두 반핵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거나, 퍼싱 2 반대 캠페인 실(seal)을 차에 다닥다닥 붙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세계의 흐름 같은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진짜 정보란 바로 그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코 신문이 도움이 되 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단지 세상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정보가 흘러 넘치도록 무진장 많은 건 아닐 까 생각했을 뿐이다. 음식의 좋고 싫고가 인생의 갈림길 나는 꽤 음식을 가리는 사람이다. 생선과 야채와 술에 관한 한은 거의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좋고 싫은 게 없지만, 육류는 쇠고기만 먹고, 조 개류는 굴을 빼고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 요리는 아예 못 먹는다. 그러니까 대개 생선과 야채를 중심으로 담백한 음식을 먹으면서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곤약이라든가 녹미채, 두부 따위. 그 러고 보니 완전히 노인식이군요, 이것은. 때때로 나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무엇은 좋고 무엇은 싫다는 판단 기준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째서 굴은 먹을 수 있는데 대합은 못 먹는단 말인가? 굴과 대합이 본질적으로 도대체 어떻게 다르 단 말인가? 그런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서, 결국 '운 명'이라는 한마디로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나는 어느 날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이유도 없이 굴을 사랑하게 되고 만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결과가 전부다. 어떤 경위를 거쳐 중국 요리를 못 먹게 되었는가 하는 것도 나에게는 커다란 수수께끼 중의 하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중국이나 중국인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대단히 흥 미를 갖고 있는 쪽이라고 생각한다. 아는 중국인이 몇 명인가 있고, 내 소설 속에도 중국인이 제법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위가 중국 요리란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잘 모 르겠다. 유아적 체험이라든가 뭐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센다가야에 살던 시절, 우리 집 근처의 키라 거리에는 맛있기로 소문 난 라면집이 두 집 나란히 있었다. 그 앞을 지날 때면 싫어하는 라면 냄 새가 풍겨서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항상 고역이었다. 내 친구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라면을 먹고 싶다는 격렬한 욕망을 억누르느라 고역이 었단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라면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의 차이로도 인생의 양상이 상당히 달라지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오해가 불러일으킨 소동 며칠 전 영자 신문을 읽다가 광고란에 개가 목을 매달고 있는 사진이 실린 걸 보았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싶어서 읽어 보니, 이것은 애견가 협회의 메시지로 "한국에서는 개를 잡아먹는 관습이 있는데 이것은 야만 스러운 일이므로 저지하자"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한 달쯤 뒤에 호놀룰루에서 신문을 읽다 보니 "중국인은 들개 사냥을 하는 데다 그 일부를 먹기까지 하는데, 이건 너무나도 야만스러 운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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