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로 머리카락에 대해서 걱 정을 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젠가 또다시 어떤 연유로 해서 거대한 트 러블에 말려들어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자질 구레한 일에 안달복달하지 않고,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지도 않고, 느긋하 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 '공부 기피증'과 '공부 중독증' 세상에는 크게 나누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그것 을 잘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잘하 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양쪽 다 잘하는 사람도 있고, 양쪽 다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충 처음에 말한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뉠 것이다. 나는 어느쪽이냐 하면 '배우기를 좋아하는' 타입으로, 다른 사람에게 무 언가를 가르치는 데는 전연 소질이 없다. 그러니까 강연 의뢰라든가 문화 교실의 '소설 작법 강좌'를 맡아 달라는 의뢰 같은 게 들어와도 언제나 사 양하고 있다. 세상에서 뭐가 불행하니 어쩌니 해도 가르치는 게 서툰 사람 이 남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야 할 때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나한테 소설 작 법을 배운 사람이 훗날 도대체 어떤 소설을 쓸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 리 속이 복잡해진다. 가르치는 쪽도 불행이지만, 배우는 쪽 역시 대단히 불 행한 것이다. 미국의 대학에는 '문학 창작과(크리에이티브 코스)'라는 게 있어서, 작가 가 학생들에게 소설 쓰는 법을 가르친다. 나도 실제로 본 건 아니므로 정확 하게는 말할 수 없지만, 대략 열 명 내외의 학생들이 1주일에 한 번 모여서 자신이 쓴 단편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고, 거기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교수인 작가가 학생들의 작품을 체크하고, 고쳐 쓰기 위 한 충고를 해준다고 한다. 이 시스템의 장점은 학생들이 전업 작가와 접촉하여 실전적인 충고를 받 을 수 있다는 것과, 작가의 수입이 안정된다는 데 있다. 교수로서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 작가는 여가 시간을 자신의 창작 활동에 쏟을 수도 있다. 이런 시스템이 교육 수단으로써 어느 정도 효과적인지를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지만, 일본 대학에도 어느 정도 이런 코스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 한다. 나에게는 퍽 무리한 얘기지만, 가르치기를 잘하는 작가와 배우기를 잘하 는 학생들이 하나가 되면 그 나름대로 효과는 나타날 것이다. "대학의 강의 실 같은 데서 어떻게 소설 쓰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느냐"라는 의견은 너무 편협한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특히 젊은 사람들은-다양한 곳에서 무 언가를 배워 가는 법이고, 그 장소가 대학의 강의실이라 해서 부적당한 건 아니다. 하긴 나 자신은 학교란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을 뿐더러 상당히 반항심이 강한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는 선생님에게 매를 맞았던 기억밖에 없고, 고등 학교 3년은 마작을 하거나 여자들과 놀러 다니는 사이에 지나갔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원 분쟁으로, 그것이 일단락 지어질 무렵에는 학생 신분에 결혼을 해서, 그 후로는 생활에 쫓기느라, 지 금 생각해 보면 꼼짝 않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부를 했던 적이 전혀 없 다. 특히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7년 동안이나 다녔지만-이것만큼은 자신 있 게 말할 수 있는데-무엇 하나 배운 게 없다. 와세다 대학에서 얻은 것이라 곤 아내뿐인데, 배우자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 점이 교육 기관으로서의 와세 다 대학의 우위성을 입증하는 건 아니다. 내가 매사에 배우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대학을 나와 이른바 '사회인'이 되고 나서부터다. 어쩌면 그것은 학창 시절에 정신없이 놀기만 했기 때문인 지도 모르고, 원래 성격상 학교란 제도가 맞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며, 아 니면 원래 나라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에서 가치를 찾아내 는 타입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일하는 틈틈이 짬이 나면 내가 좋아하는 영어 소설을 열심히 번역하거나, 친구에게 불어를 배우거나 하면서 지냈다. 그뿐만 아니라 일하면서도 의식적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거나 이런 저 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자 노력했다. 남의 얘기를 듣는 건 꽤 재미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여러 가지 사고 방식이 있다. 개중에는 '과연 그렇군' 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생 각도 있고, 전혀 무의미하고 바보 같은 생각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무의미 하고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해도 잘 들어 보면 그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 위 에 확고하게 성립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먼저 한걸음 물러나 이야기를 들으려는 태도를 보이면, 대개의 사람들은 비교적 정직하게 마음 을 열고 얘기해 준다. 당시에는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지 만, 훗날 소설을 쓰는 데 이런 학습 경험은 무척 도움이 되었다. 이런 건 대학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젊을 대 지나치게 공부를 하면 어른이 되어 '공부 기피증'에 걸리게 되거나 반대로 '공부 중독증'에 걸리게 되지 않을까? '공부 기피증'이란 학창 시절에는 무턱대고 그저 공부만 하다가 사회에 나온 다음부터는 뒹굴며 텔레비전만 보는 증상이고, '공부 중독증'이란 좌 우지간 뭔가를 공부하지 않으면 진정이 되지 않는 증상이다. 뭐 그런 건 어차피 남들이 사는 방식이니까 아무래도 좋지만, 내 개인적 인 생각으로는 어린 시절에 실컷 놀았던 사람 쪽이 훨씬 좋다. 오디오 스파게티 간혹 신문이나 잡지를 읽다 보면 이런 저런 것이 발견되거나 발명됐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개중에는 '와아' 하고 감탄하게 되는 것도 있고, 대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도쿄 대학 이 학부의 XX 박사는 일본 원숭이의 뇌하수체를 전기적 처리에 의해 계층화하 는 데 성공했다"라는 소리를 들어도-이것은 물론 엉터리로 지어 낸 얘기지 만-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설령 '와아' 하고 감탄하게 되는 유의 일이라도 그게 어떤 원리에 입각하여 어떠한 단계를 거쳐 성립되었는가에 이르면, 나로선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옛날부터 화학이나 물리에는 굉장히 약했던 것이다. 이런 발명 및 발견은, (1) 어떠한 필요에 의해서 (2)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이론적 고찰 및 시행 착오가 있 은 후에 (3) 발명 및 발견에 이른다. 라는 과정을 거치지만, (1)과 (3)은 대충 이해할 수 있어도 (2)의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어려워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1)이러저러한 필요가 있어서 (2)얼렁뚱땅 (3) 이러한 것이 생겨났다. 라는 정도의 인식으로 모든 게 끝 나 버린다. 요컨대 비디오를 예로 들면, (1) 영상을 테이프에 간단히 녹화할 수 있으면 편리하다 (2) 얼렁뚱땅 (3) 비디오가 생겨났다. 라는 식이다. 비디오가 어떤 원리로 성립되어 있는지 나로선 전혀 설명할 수 없다. 그 러나 일상적으로 나는 비디오를 별다른 지장 없이 사용하고 있고, 제법 귀 중하게 여기고 있다. 와트의 증기 기관이나 마르코니의 전신 장치라든가 라 이트 형제의 비행기 정도라면 나도 어떻게든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데, 얘기가 그 이후의 테크놀러지에 이르면 내게 있어서는 거의가 어둠 속 저편 에 묻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건-결코 안이하게 동료 의식을 구하고 있 는 건 아니지만-나 한사람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가령 모두들 일상적 으로 사용하고 있는 2,000~3,000엔만 내면 손쉽게 살 수 있는 포켓형 계산 기만 해도, 어떻게 그렇게 작은 물건이 루트13 곱하기 루트272를 계산할 수 있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일반 적인 사람들은 분명히 나처럼 "이건 원래 이런 거니까" 하고, 계산기를 사 용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테크놀러지에 관한 한 이른바 절대 군주제 같은 체 제하에 놓여져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칙명' 같은 새로운 발명 내지는 새로운 발견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모두들 "이게 무슨 일일 까?"라든가 "잘 모르겠는데" 하며 와글와글 떠들다가, 그래도 어쨌거나 "임 금님 어명이시니까 틀림없을 거야"라는 말에 길들여져 버리는 것이다. 적어 도 기술에 관해서는 민주주의라는 것도 완전히 무너지고 마는 것 같다. 나는 현재 집에 두 대의 레코드 플레이어와 세 대의 카세트 테이프 리코 더, 한 대의 FM 튜너와 두 대의 VTR, 한 대의 레이저 디스크 플레이어를 두 고 사용하고 있는데, 마치 지옥과 같은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우선 세 대 의 카세트 테이프 리코더를 테이프 셀렉터에 연결하고, VTR과 레이저 디스 크 플레이어를 비디오 셀렉터에 연결한다. 그리고 비디오 셀렉터에 FM 튜너 의 출력 선을 꼽아 하이파이 녹음을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오디오 테이 프에 더빙할 수 있도록 비디오 셀렉터의 출력 선을 테이프 셀렉터에 꼽는 다. 그러고 나서 FM 튜너의 전원을 오디오 타이머에 꼽아서... 하고 생각하 다 보면 도중에 뭐가 뭔지 모르게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예를 들어 "레코드를 들으면서 FM 방송을 비디오 데크에 녹음하고, 그것 을 동시에 카세트에 더빙하는 게 가능한가?" 따위의 질문을 받으면 잠시 생 각하지 않고는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뿐더러, 내려진 결론도 대개는 틀리기 일쑤다. 배선을 메모한 종이를 뚫어져라 들여다봤자 머리만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집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노력은 아예 포기한 터라 오디오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가장 곤란한 건 이사를 할 때다. 기계를 늘어놓고 배선을 다시 하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린다. "어어, 그러니까 이 출력 선이 이쪽 입력 선으로 가 고..."라며 낑낑거리다 보면, 점점 '어째서 내가 이런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하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고교 시절에 처음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었을 무렵에는 세계가 훨씬 단순 했다. 플레이어와 스피커를 통합 앰프(그런 게 있었다)에 연결하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고, 그 다음은 느긋하게 음악을 듣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스파게티 5인분을 바닥에 퍼질러 놓은 것 같은 코드 더 미에 쭈그리고 앉아 악전고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민주주의의 죽음 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대체 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앗, 미안, 실수였어!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게 된 이후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사람은 반 드시 실수를 한다'라는 것이다. 하긴 글을 쓰기 이전부터 일상적으로 여러 가지 실수를 저질렀으니까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렇게 통감할 필요도 없지 만, 글을 쓰기 전에는 대부분의 잘못은 "앗, 미안해, 실수였어" 하고 넘어 갔다. 상대방도 "정말 어쩔 수 없군" 하는 정도로 넘어가 주었다. 그러나 글을 쓰면 실수란 것이 확실하게 흔적을 남기게 될 뿐 아니라 그 것이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다. 실수를 깨달았더라도 "앗, 미안해요. 실수였 어요" 하고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과를 하며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 릇이다. 암만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는 해도 이건 너무 골치 아프다. 그 대신에-라고 할 것도 없지만-나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실패에 대해서는 비 교적 관대한 편이 아닌가 한다. 다른 사람이 실수했다고 해서 그걸 트집잡 으며 "어이, 너 그때 그런 말을 했었지. 맞지, 그랬었잖아" 하며 빈정대는 일은 일단 없다. 덕분에 14년 동안 그런대로 평온한 결혼 생활을 해왔다. 문장상의 실수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번역이다. 여하튼 원본이 있으므 로 나보다 어학력이 뛰어난 사람이 치밀하게 원본과 번역문을 맞춰 보면 자 잘한 실수 같은 건 얼마든지 나오게 된다. 얼마 전 가쓰시카 구에 사는 모리시타 씨라는 사람이 엽서를 보냈는데, "당신의 번역 중에는 2주(a couple of weeks)가 '이틀'로 되어 있는데, 이 것은 '2주'를 잘못 옮긴 게 아닙니까?"라고 지적해 주었다. 이것은 정말 누 가 뭐라 해도 나의 잘못이다.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 후에도 부끄럽지만 'twenty one'을 '31'로 옮긴 적도 있고, 'bald'와 'bold'를 혼동해서 번역 한 일도 있다. 어째서 그런 실수를 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학창 시절, 답 안 용지에 "사소한 실수가 많으니까 다시 잘 보도록" 하고 몇 번이나 씌어 져 있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성향은 나이를 먹어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것 같다. 다만-이런 말을 쓰면 변명을 늘어놓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지만-하나의 문 장, 하나의 단어를 정확하게 옮기기 위해서 하루종일 끙끙대는 경우도 있다 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그리고 그런 조마조마한 부분을 어찌어찌 통과해서 비교적 평탄한 부분으로 들어갔을 때 후유 하고 한시름 놓다가 사소한 실수 를 하게 되는게 대부분이다. 물론 나중에 원본과 번역문을 몇 번이고 다시 맞춰 보긴 하지만, '이런 데서 실수를 했을 리가 없어'라는 생각이 머리 속 에 박혀 있어서 몇 번이나 체크를 해도 실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난 처한 일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식은땀이 흐른다. 다른 사람에게 지적을 받을 것까지도 없이, 나 자신이 오역을 나중에 퍼 뜩 깨닫는 경우가 있다. 밤중에 이부자리에 들어가 불을 끄고 멍청히 누워 있을 때에 "앗, 틀렸어. 그건 실수야!" 하고 벌떡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주의하지 않아 저지른 실수라기보다는 좀더 중대한 의미를 가진 잘못일 때가 많다. 따라서 전자보다 식은땀의 양도 훨씬 많다. 그러나,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부주의해서 저지른 무수한 실수들을 잔뜩 모아 그것을 병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꽤 재미있는 연구가 되지 않을까 하 는 생각도 든다. 문장뿐만 아니라 나는 일상 생활의 온갖 측면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실수를 저지르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소변을 봐야지' 하고 화장실에 갈 생각이었으나 잘못해서 욕실에 가서 샤 워를 하고 그대로 방에 돌아와선, "앗, 이상한데 아직 소변이 마렵잖아. 몸 상태가 안 좋은 걸까?" 하고 의아해 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런 거에 비하면 'twenty one'을 '31'로 번역하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전철 시간표나 전화 번호부를 만드는 편집자가 되지 않아 정말 다행 이다. 번역만이 아니라 이렇게 내 글을 쓰고 있을 때도 때때로 심한 실수를 저 지른다. 그러나 나는 데이터를 구사하여 이론을 전개해 나가는 타입의 글쟁 이도 아니고, 모델 소설이나 논픽션도 쓰지 않아 그 일로 특별히 누군가에 게 상처를 입히는 일도 없으므로 대개의 실수나 사실 오인은 웃음으로 넘겨 버리고 만다. 며칠 전 아키시마 시의 오카무라 씨라는 사람으로부터, 하루키 씨의 소설 중에 '폴크스바겐의 라디에이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상하지 않 느냐는 투서가 모 잡지에 게재된 걸 알고 계십니까, 하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람들한테 물어 보니 분명히 폴크스 바겐에는 라디에이터가 없는 듯하다. 영락없는 나의 실수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하느 냐 하면, 그러기는커녕 웃으며 넘겨 버린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설이기 때 문이다. 소설의 세계에서는 화성인이 하늘을 날아다녀도, 코끼리를 축소하 여 손바닥에 올려 놓아도, 폴크스바겐에 라디에이터가 붙어 있어도, 베토벤 이 교향곡 11번을 작곡했다 해도, 그건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 자면, '앗, 그렇구나. 이건 폴크스바겐에 라디에이터가 붙어 있는 세계의 얘기구나!'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어 주면 나는 굉장히 기쁠 것 같다. 그래도 역시 실수는 자랑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성실한 분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나올 영문판 <핀볼, 1973>에서는 그 부분을 제대로 고쳐 놓았으 니까 그 쪽을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보니 책 소개까지 하게 되었 다. 나의 독서 이력서 요즘에는 옛날에 비하면 서점을 찾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 같다. 왜 서점에 가지 않게 되었는가 하면, 그 이유는 스스로 글을 쓰게 된 데 있다. 서점에 내 책이 나열돼 있는 게 왠지 모르게 쑥스럽기도 하고-나열돼 있지 않으면 이것 역시 곤란한 일이긴 하지만-해서 서점으로 향하는 발걸음 이 뜸해지고 말았다. 집 안에 책이 너무 많이 쌓여 있는 탓도 있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몇 백 권이나 되는데, 그 위에다 쌓고 또 쌓는 것이 어쩐지 어리석게 느껴진 다. 지금 쌓여 있는 책 더미를 완전히 정리하고 나면 서점에 가서 보고 싶 은 책을 사 모아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웬일인지 이게 전혀 줄지를 않고 오 히려 점점 늘어만 가고 있는 형편이다. <블레이드 러너>는 아니지만, 정말이지 나도 '독서용 복제 인간' 같은 게 갖고 싶다. 복제 인간이 부지런히 책을 읽고 "주인님, 이건 좋습니다. 읽으 셔야만 합니다"라든가, "이건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요약해서 가르쳐 주면 나도 무척 편하겠다. 딱히 복제 인간이 아니더라도 활력이 넘치고 한 가한 데다 책에 대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지만, 좀처럼 그 렇게도 되지 않는다. 서점에 별로 가지 않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외국 소설을 번역한 신간이 눈에 띄게 줄어든 데도 있다. SF라든가 추리물이라든가 모험 소설 같은 건 꽤 많이 번역되지만, 이런 번역물들은 읽을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뒤 섞여 있어서 어지간한 나도(한 때는 무턱대고 읽어댔었지만) 요즘에는 별로 읽지 않게 되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순수 문학을 번역하여 발행한 수는 극 히 적다. "순수 문학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팔리지 않습니다"라고 출판사 사람들은 구실을 갖다 대지만, 어쨌거나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독서 시간이 대폭 짧아진 데도 원인이 있다. 최근 출판 사 사람들과 만나면 한결같이 입을 모아 "요즘 젊은이들은 느긋이 앉아서 책을 읽을 줄 몰라요"라며 투덜거리고, 나 역시 맞장구를 치며 "그래요, 참 큰일이군요" 하고 말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 자신도 별로 책을 읽지 않게 된 것이다. 10대 시절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장 크리스토프>,<전쟁과 평화> 와 <고요한 돈강>을 세 번씩이나 읽은 것을 돌이켜 보면 아주 먼 옛날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당시에는 좌우지간 책이란 건 양만 많으면 그저 기뻤고, <죄와 벌> 같은 건 페이지가 적어서 불만이었을 정도다. 그 당시에 비하면- 한 권의 책을 꼼꼼하게 읽게 되기는 했어도-독서량은 5분의 1정도로 줄어든 것 같다. 왜 이렇게 책을 읽지 않게 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오로지 독서에 할애하 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독서 이외의 활동에 많은 시간을 빼앗겨, 그 악영향으로 책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고 만 것이다. 가령 조깅에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음악을 듣는 데 두 시간, 비디오를 보는 데 두 시 간, 산책을 한 시간...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가만히 엉덩이를 붙이고 책을 읽을 시간 따위는 거의 없는 것이다. 이건 진짜다. 뭐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책을 읽어야 할 때는 한 달에 몇 권이나 눈을 부릅뜨고 읽지만, 그 런 종류의 책이 아니라면 솔직히 말해서 요즘에는 도무지 읽지 않는 형편이 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하기야 이런 상황 내지는 경향에 빠져 버린 사람이 결코 나 하나만은 아 닐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그다지 책을 읽지 않게 된 것도 역시 독서 이외의 다양한 활동에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대폭 할애하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라고 말하니 갑자기 너무 아저씨 같은 느낌이 들지만-전체적으로 꽤 시간이 남아돌아, '할 수 없군, 책이나 읽을까' 하는 기분이 지금보다는 비교적 쉽게 들었던 것이다. 당시 에는 비디오도 없었고, 레코드도 상대적으로 비싸서 그렇게 많이 살수 없었 으며, 스포츠도 오늘날만큼 유행하지 않았다. 당시의 분위기도 매우 이론적 이어서 어떤 유의 책을 일정량 이상 읽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풍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뭔데요? 그런 거 읽지 않았어요. 난 몰라요"라며 자 연스럽게 대답한다. 그 외에 할 일도 잔뜩 있는 데다 자기를 표현할 수 있 는 장소와 방법, 매체도 다양하게 갖춰져 있다. 결국 독서라는 것이 두드러 진 신화적 매체였던 시대는 급속하게 종식되고 만 것이다. 오늘날 독서란 수많은 각종 매체 중의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경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것은 대부분 의 사회 현상이 그렇듯,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교양주의적,권위주의적 풍조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걸-정말로 사라져 가고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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