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1편 (1/20) | 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 웹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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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1편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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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사: 문학사상사 제 1 장 문학 안팎의 내 삶 나에 관한 헛소문 사태 소문이란 그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교우 관계가 그다지 넓 은 편이 아니라서-정확하게 말하면 좁다-소문에 말려드는 일이 별로 없지 만, 그래도 전혀 모르는 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요 즘에는 고맙게도 그리 나쁜 소문은 들리지 않는다. "무라카미가 BMW를 산 것 같아"라든가(살리가 없다), "무라카미는 매일 두부를 세 모나 부쳐 먹는 대"라든가(한 모밖에 안 먹는다), 그 정도의 것들이다.
이해가 잘 안 가서 "어째서 내가 하루에 두부를 세 모씩 부쳐 먹어야만 한답니까?" 하고 상대방에게 물어 보면, "아니, 잡지 인터뷰에서 그렇게 대 답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묻는다.
잘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렇게 대답을 한 기억이 있다.
몇 번이고 인터뷰를 하다 보면 질문이 거의 비슷해서 따분해 지기 때문에 때때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대답해 버리게 된다. "좋아 하는 거요? 두부부침이에요, 하루에 세 모는 먹는 것 같네요" 하는 식이다.
BMW도 어딘가에서 농담으로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깔보며 살다가는 언젠가 안 좋은 꼴을 당하지 싶 다.
하여튼 내 인터뷰 기사는 너무 믿지 말고 적당히 읽어 주었으면 좋겠 다.
때때로 내가 다시 읽어 봐도 아연 실색하는 일이 있을 정도니까.
하기 야 "연수입은?" 따위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 까? 그러나 그건 그렇다손 치고, 해독이 없는 소문이란 즐겁다.
문단에도 여 러 가지 소문이 있어서, 가끔 편집자를 만나 "사실은요, 무라키미 씨.
요전 에 말이죠" 하고 하나 둘 문단의 소문을 들으면 "그런가, 그런 일도 있었 나?" 하고 어느 정도 사회에 참여를 하는 듯한 기분이 된다.
그렇지만 그런 건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으로, 신주쿠 골든 가에 어떤 얼음 기둥이 치솟았 는지를 나로선 알 수가 없다.
펭귄 북스에서 나온 <루머>라는 책이 있다.
미국에 퍼져 있는 다양한 소 문이 진짜인지 헛소문인지를 가려낸 퍽 재미있는 책인데, 이것을 읽고 있으 면 세상에는 실로 갖가지 소문이 있구나 하고 정말 감탄하게 된다.
예를 들면 "존 딜리저의 페니스는 너무 커서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보존되 어 있다"라는 것은 헛소문이고, "아인슈타인의 뇌는 위치타의 의사가 병에 담아 보존하고 있다"라는 건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은 사후에 자신의 뇌를 연구용으로 써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게 돌고 돌아 위치타까지 흘 러 들어가 병에 담긴 채 사이다 상자 속에 처박혀 있다는 것이다. "1943년에 주조된 1센트짜리 동전을 포드 사에 가져 가면 새 차를 한 대 준다"라는 소문도 있는데, 이것은 유언비어다.
그러나 1943년의 1센트짜리 동전은 희귀해서 실제로 새 차 한 대 정도의 값으로 흥정을 한다고 하니까 새빨간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미국 판 <플레이보이>지 표지 타이틀의 P자에 별이 몇 개 붙어 있는가가 (1978년 이전의 <플레이보이>지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체크해 보십시오), 바로 편집장인 휴 헤프너가 그의 파트너와 그 달에 몇 번 섹스를 했는가를 나타내는 것라고 믿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유감스럽지만 헛소문이다. <플레이보이>지는 지역별,용도별로 달리 편집되고 있었고, 별 의 갯수는 그 표시였던 것이다.
문학에 관계된 것으로는 "토머스 핀천은 J.D.샐린저의 필명"이라는 굉장 한 소문이 있다.
이것은 진짜 완벽한 헛소문이다.
샐린저가 자택에 틀어박 혀 있었고, 핀천이 사진을 발표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은 탓에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됐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남들이 모르는 필명을 두 개 정도 갖고 있지만 말이다. "프랑스에서 제리 루이스는 채플린과 쌍벽을 이룰 만큼 대단한 평가를 받 고 있다"라는 소문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필시 프랑스 인들 이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시기 때문일 거라고 저자는 쓰고 있다.
그리고 구리코 모리나가 사건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식품 관련 회사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예를 들면 맥도날드 햄버거에 들어 있다고 소문이 났던 것만 해도, 고양이 고기, 캥거루 고기, 거미 알, 지렁이...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맥도날드 사는 광고를 할 때 항상 '100퍼센트 쇠고기'를 강조하는 것이다.
담배 회사인 체스터필드 회사는 한때 "공장에서 문둥병 환자가 발견됐다" 라는 소문에 휩쓸려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있다.
회사는 탐정 몇 명을 고용 해서 그 소문의 발생지에 가장 가까운 스물 다섯 명 중 범인을 밝혀 내는 데 1,000달러를 걸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1,000달러를 손에 넣을 수가 없 었다.
엉킨 실타래를 풀 듯이 어느 정도 소문의 전파 경로를 거슬러 올라갔 지만, 좀처럼 발생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남에게 해가 되는 거짓말이란 대단히 무서운 것이다.
며칠 전 어떤 여성 편집자에게서 "무라카미 씨도 꽤 짖궂더군요.
너무해 요" 하는 소리를 들어서 그 소문의 발생지를 캐어 보니, 아니나다를까 안자 이 미즈마루 씨였다.
곤란하다구요, 그런 짓은.
그러나 자유업은 즐겁다 대도시에서 자유업을 공연히 화려한 직종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성인 남자가 대낮부터 빈둥빈둥 놀고 있어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일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나처럼 대도시를 벗어나-도심지의 집세가 너무 비싼 데 질 려서-교외의 중소 도시를 전전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나름대로 고충이 많 은 직업이 자유업이다.
우선 첫째로 다른 사람들이 '자유업'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 한다는 점 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싫은 것은 보너스 시즌의 은행이다.
정말 싫다싫다 해도 이것처럼 싫은 건 없을 것이다.
창구의 업무가 끝나기를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면 어김없이 은행 직원이 다가와선 "보너스를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셨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런 걸 결정할 턱이 없으니까 "정하지 않 았는데요"라고 대답하면, "그러시면 우선 이 정기 예금을 드시고 이러쿵저 러쿵" 하고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저, 보너스가 없는데요"라고 하면 상대방은 하나같이 '네에?' 하는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마치 비로 인 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폐가를 바라보는 눈초리다.
그 선에서 "그럼, 실례했습니다"하고 물러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그것 으로 별상관이 없다.
그러나 반 정도는 물러나지 않는다.
대개 내가 은행에 가는 것은 아침 아홉 시나 열 시쯤으로 손님이 많지 않은 시간이라서 상대 방 역시 한가한 것이다.
대체로 "저, 실례지만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말을 걸어 온다.
내가 "자유업입니다"하고 말하면 은행 직원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 을 짓는다. "목수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야 뭐 조깅 팬츠에 고 무 샌들, 선글라스 차림으로 은행에 가는 나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 유업->목수라는 극단적인 발상을 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애당초 목 수가 자유업이란 말인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음, 문필업인데요" 하면, "아아, 그렇습니까.
토지 를 분필하는 일을 하시는군요" 하는 사람까지 있다.
이것도 잘 이해가 안 간다.
확실히 은행원다운 발상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분필업'이란 직종 자 체가 세상에 있기는 한 걸까? 직종별 전화 번호부를 찾아봤지만 그런 건 어 디에도 없었다. '분필업'도 없고, '문궤업(역주:분필업과 함께 일본어의 음 은 '분피스교'로 같다)'도 없다. '분피스교'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문필업' 이다.
그리고 귀찮아서 "저술업입니다"라고 고쳐 말하면, 그제야 상대방도 대충 알아듣는다. "나오키 상이라도 타시게 되면 우리 은행에 몽땅 예금해 주십 시오, 하하하" 하고 가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 진 사람일까? 아마 친절하게 격려를 하려는 뜻이겠지만, 이쪽으로선 누가 예금 따윌 한대? 하는 기분이 된다.
그렇지만 이 정도도 아직은 나은 편이다.
심한 경우에는 "저술업입니다" 라고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아아, 그러십니까? 저술업이십니까?"라고 하 기에 겨우 뜻이 통했구나 하고 생각하면, "그럼 졸업한 다음에 보너스를 타 시면 그때는 꼭 저희 은행에..."라고 말해서 사람을 이만저만 실망시키는 게 아니다.
서른여섯 살이나 먹은 남자를 붙잡아 놓고 졸업이니 뭐니 할말 이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하지만, 뭐 은행에는 은행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있고 세상을 파악하는 방식이 있나 보다.
난 잘 모르겠다.
어쨌건 보너스 시즌에는 되도록 은행 근처에 가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기분이 좋았던 적 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같은 은행에 2~3년이나 다니다 보면 얼굴이 익혀서 보너스 시즌이 되어도 '저 작자는 별볼일 없으니까' 하고 아무도 접근해 오지 않게 된다.
참고 견디면 복이 온다더니, 반복이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작년까지 3년 동안 다녔던 교와 은행 기타 나라시노 지점 사람이 내 소설을 읽고 독후감 을 써서 사내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은행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하기야 나는 이사광이기 때문에 자주 이사를 하는 데, 그때마다 각지의 은행에서 "저, 실례지만 직업은?" 하는 질문을 몇 번 이고 되풀이하여 들어야 한다.
정말이지 피곤한 노릇이다.
교외의 전원 도시란 사실 샐러리맨의 소굴 같은 곳이다.
아침 아홉 시가 지나면 성인 남자라고는 집배원 아저씨나 채소 가게 아저씨말고는 전혀 볼 수가 없다.
이곳에는 아줌마들과 어린아이들밖에 남지 않는다.
그런(교외의 전원 도시 같은) 곳을 어슬렁 어슬렁 산책하다 오락실에 들어가거나 냄비를 들고 두부를 사러 가거나 하니, 이웃에서도 별로 곱지 않은 눈으로 본다.
슈퍼에 가서 물건을 사다 보면 바겐 세일을 하는 생리 용품을 대형 상자로 잔뜩 사고 카운터에 서 있는 아줌마들 틈에 끼여, '이건 또 뭐야, 싫다 싫 어.
대낮부터 왜 이런 데 남자가 있는 거야' 하는 느낌의 눈흘김을 당하기 가 일쑤다.
자유업이란 것도 여러 가지로 괴로운 점이 많은 직업이다.
그래도 꼭 자 유업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쿄의 미나토구 근처에서 살면, 아무 눈치도 볼 필요 없고 내 멋대로 살아갈 수 있으니 즐겁기 그지없다.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은 연필 얼마 전에 볼일이 좀 있어서 어떤 잡지사의 편집자를 만난 뒤에 술을 마 시면서 둘이서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화제가 학용품에 대한 걸로 흐르고 말았다.
학용품 얘기는 나도 무척 좋아하므로, 볼펜은 이 런 게 좋다는 둥, 지우개는 이런 것만 쓴다는 둥, 하고 술자리에서 두서 없 이 얘기를 이어 갔는데, 그러던 중 상대방이 "그런데 무라카미 씨는 어느 정도로 딱딱한 연필을 쓰시나요?" 하고 물었다.
나는 늘 F 심 연필을 쓰고 있으므로 "저, F 연필인데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십니 까? 그런데 F 연필은, 전 늘 그런 생각을 하는데요,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 생 같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때는 술자리였으므로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세상에는 다양한 감 수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는 정도로 웃어넘겨 버리고 곧 다른 화제로 옮 겨 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얘기가 점점 마음에 걸렸다.
어째서 F 연필 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인지 한번 의아해 하기 시작하니,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뭐가 뭔지 영문도 모른 채 정말로 F 연필이 단정하게 세일러복을 차려 입은 여학생으 로 보이게 됐다.
이렇게 되면 여간 난처한 게 아니다.
요즘에는 F 연필을 손에 쥘 때마다 세일러복 차림의 여학생이 떠오른다.
물건에 일단 어떤 이 미지가 정착되어 버리면, 그 다음에는 거꾸로 그 이미자가 물건을 규정하게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현상이 다.
이런 현상이 그대로 진행되면 연필을 손에 쥘 때마다 성욕이 자극을 받는 다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될지도 모르고, 그렇데 되면 직업상 연필을 써야 하는 일이 많은 나로서는 이만저만 곤란해지는 게 아니다.
차라리 F 연필을 그만 쓰고 HB 연필로 바꿔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딱 하게도 이번에는 "만약 F 연필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이라면 HB 연필을 학생복을 입은 남자 고등 학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건 그것대로 또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나는 원래 세일러복이니 학 생복이니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세일러복 같은 건 멀리에서 보면 꽤 괜 찮아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무척 지저분하고, 별로 볼품도 없다.
학생복의 더러움에 대해서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H 연필은 어떨까 했지만, 이건 또 어째 '폴리스(역주:록 밴드의 이름)'의 스팅하고 느낌이 비슷하다.
스팅에 대해서는 별달리 나쁜 감정을 품고 있진 않지만, 감정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연필이 스팅과 비슷하다는 건 어쩐지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일이다.
귓가에서 밤낮으로 '폴리스'의 음악 이 울려 퍼지는 듯하다.
2H 연필처럼 딱딱한 연필이나 B 연필처럼 무른 연필은 일하기에 적당치 않으므로, 나로서는 결국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과 '학생복을 입은 남학 생'과 '폴리스의 스팅'이라는 세 가지 가능성이랄까 선택의 여지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어쩌다가 고작 연필 따위에 관한 일로 이렇게까지 골치 아픈 상황에 빠져 들게 되었는지를 나로선 잘 알 수 없지만, 애초에 "F 연필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지 않습니까?"라고 쓸데없는 말을 꺼낸 편집자의 잘못이다.
그 뒤로 이미자가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부풀어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원고를 수정하는 데 연필이 아닌 볼펜을 사용할 수밖 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볼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 으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다.
볼펜은 그저 볼펜일 뿐이다.
그런데, 연필이란 꽤 사랑스런 필기 도구다.
요즘에는 샤프 펜슬의 성능 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탓에 학용품 업계에서 연필이 차지하는 지위가 다소 저하된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필에는 사람의-적어도 나의-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있다.
단순하다면 참으로 단순한 제품이지만, 연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으면 거기에는 무수한 수수께끼와 지혜가 포 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맨 처음 연필을 만든 사람은 꽤나 여러 가 지로 힘들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치즈를 넣은 치쿠와(역주:으깬 생선살을 길쭉하게 빚어 대꼬챙이에 꽂아 구운 음식)을 발명한 사람에 대해서 대단한 외경심을 품고 있는데, 치즈를 넣은 치쿠와보다는 연필 만들기 쪽이 발상으 로서도 기술로서도 훨씬 복잡할 것 같다.
나는 원고의 자잘한 '수정'에는 대개 연필을 사용한다.
샤프 펜슬도 편리 해서 가끔 사용하지만, 감촉과 쓰는 맛으로 따지자면 극히 평범한 연필 쪽 이 일하기에는 딱 좋다.
아침에 한 다스 정도의 연필을 깎아서 온더록용 유 리잔에 꽂아 두고, 그것을 차례대로 써가는 것이다.
그러니까-얘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만-연필이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의 모습으로 보이거나 하면 매우 곤혹스럽다. '다음에는 너를 써볼까?' '꺄악, 싫어요, 저리 가요!'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일은 조금도 진척되지 않고, 정말 나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신초샤의 스즈키 지카라 씨 때문에 이런 곤욕을 치르게 됐는데, 정작 본 인은 술에 취해서 자기가 무슨 소릴 했는지조차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네?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어째서 F 연필이 여학생과 닮았죠?"라고 오 히려 묻는다.
그런 걸 나한테 물어 보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영화 중독증 장편 소설을 쓰는 일이 겨우 마무리되고 필름 교정도 끝나, 출판되기만을 기다릴 때가 나에게는 가장 마음 편하고 평온한 시기다.
쓰고 싶은 건 다 썼고, 일단 해야 할 일도 없으니까-그렇긴 해도 때로는 생활을 위해 이런 원고도 쓰곤 하지만-매일 멍하니 툇마루에 앉아서 고양이랑 봄볕을 쬔다.
나는 내가 쓴 글이 활자화되어 세상에 나올 때까지는 도무지 다음 소설에 착수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몇 개월쯤은 좋건 싫건 빈둥빈둥 놀면서 보내게 된다.
이렇게 하강 기류를 탄 것처럼 마음 편한 시기에는 대체로 영화를 왕창 본다.
최근에는 비디오 테이프도 많아졌고 나도 자주 대여점 신세를 지고 있지만, 역시 이런 한가한 시기에는 영화관까지 전철을 타고 진출해서 어둠 속에서 스크린을 노려보다가 맥주 집에서 한잔 걸치고 돌아오는 게 제일이 다.
영화관에서 보고 있는 한, 마누라가 "저것 좀 봐요, 다이안 키튼이 입 고 있는 저 스커트 괜찮지 않아요?"라며 쿡쿡 찌르는 일도 없고, "잠깐 되 돌려 봐요.
저 플로어 스탠드 비쌀 것 같네"하는 일도 없다.
플로어 스탠드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이번 봄에도 그런 이유로 해서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보았다. <듄,모래의 혹성>을 보고, <2010년>을 보고, <터미네이터>와 <리틀 드러머 걸>을 보고, <네버 엔딩 스토리>를 보고(어째서 타이틀을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은 걸 까?), <아마데우스>를 두 번 보고, <사랑에 빠져서>와 <슛 더 문>을 보고, <베스트 키드>를 보고, 바빠서 놓쳤던 <보디 더블>과 <젊은 사자들>(이 영 화는 <에스콰이어>지 선정 1984년도 좋지 않은 영화다)을 재개봉관까지 쫓 아가서 보고, 오래간만에 방화도 보고...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봤다.
이 정도로 연달아서 영화관에 드나들면 과연 영화를 보았구나 하는 보람 같은 게 느껴진다.
영화라는 것은 의자에 털썩 앉아서 머리를 텅 비워 놓고 있으면 저쪽에서 알아서 필름을 돌려 진행시켜 주므로 정말 편하다.
연극이나 콘서트 같으면 "오늘은 흥이 덜 나는 게 아닌가"라든지, "어딘가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건 아닌가" 내지는, "박수는 이 정도만 치면 될까" 하는 등 나름대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어 좀처럼 머리를 비워 놓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아무 죄 없는 할리우드 영화를 멍하니 보는 게 상책이다.
뭔가 계몽을 시키려 들면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고 만다.
이번에 본 일련의 영화들은 모두 비교적 재미있고, 심하게 계몽시키려는 부 분도 없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트루먼 카포티는 그의 소설 속에서 영화를 종교적 의식에 비유했는데, 확 실히 그런 말을 들으면 또 그런 것 같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혼자 스크린 과 마주하고 있으면 왠지 내 혼이 잠정적인 장소로 밀려난 듯한 기분이 든 다.
그리고 몇 번이고 계속해서 영화관을 드나드는 사이에, 그런 기분이 내 인생에 있어서는 계속 이어져야 할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 중독이다.
일찍이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영화관을 찾았다.
마침 학원 분쟁이 일어났던 무렵이어서 수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파트와 아르바이트와 영화관이라는 트라이앵글을 뱅글뱅글 돌았었다.
물 론 매일매일 볼 수 있을 만큼 영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같은 필름 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보거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B급,C급 영화를 뼈 다귀라도 쪽쪽 빠는 듯한 기분으로 보았다.
그러나 보니 꿈속에서 MGM의 사 자가 포효를 하기도 하고, 도에이의 파도가 부서지고, 20세기 폭스의 라이 트가 광고와 함께 돌아가기도 했다.
여기까지 이르면 이건 이미 완벽한 병 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른바 '명작'보다는 볼 만한 영화가 없 어서 어쩔 수 없이 되풀이해서 봤던 필름이나 별내용도 없는 작품 쪽이 생 생하게 기억나니 이상한 일이다.
별내용도 없는 B급,C급 작품은 이른바 '명 작'과는 달리 내 스스로가 어떻게 해서든 괜찮은 부분을 찾아내려고 노력하 지 않으면 단순한 시간 낭비가 되고 만다.
그런 긴장감을 그대로 마음에 확 실하게 새겨 두었기 때문에 훗날까지 기억에 남는 건 아닐까? 한마디로 영 화라 해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 본 영화 중에서 그런 B급,C급 작품 감상의 묘미를 맛보게 해준 건 뭐니뭐니 해도 존 밀리어스의 <젊은 사자들>이었다.
다들 이 영화를 호전적 이며 황당 무계한 영화라고 말하고 분명히 그렇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여긴 것은 미국이 소련 과 쿠바 연합군에게 점령당한 데 대해 미국의 소년들이 게릴라전으로 저항 한다는 상황 설정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입장과 위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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