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 제1권 안내 ━━━━━━━━━━━━━━━━━━━━━━ 천중행·천중화님의 새로운 무협소설이 연 재를 시작했습니다. '검'이라는 소설인데... 나온지가 얼마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 는 소설입니다. - 지금 그를 깨워라. - 나태(懶怠)의 나른한 침상에 누워 - 염세의 나락에 잠겨 있을 그를... 검(劍). 죽음의 시한을 딛고 일어나 찬란한 유성처 럼 스스로를 불태운 위대한 소년무인의 일 대기. 천년의 저주에 맞서 싸우는 대장정이 이렇 게 시작된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검 제1권 - 차 례 - ━━━━━━━━━━━━━━━━━━━━━━━━━━━━━━━━━━━ 서(序) 개천지장(開天之章) 제1장 황궁서고(皇宮書庫)의 신비소년(神秘少年) 제2장 작은 하늘 제3장 뜻밖에 맺어진 남녀(男女) 제4장 시작되는 음모 제5장 천기신궁(天機神宮)의 대혈전(大血戰) 제6장 기연(奇緣) 제7장 신지(神智)를 깨닫거든 도(刀)를 들어라! 제8장 강호(江湖)에 부는 바람(風)! 제9장 강호명숙대실록(江湖名宿大實錄) 제10장 우리 날개를 펴자! 제11장 무황궁(武皇宮) 무너지다 ■ 검 서(序) 개천지장(開天之章) ━━━━━━━━━━━━━━━━━━━━━━━━━━━━━━━━━━━ 굵은 황촛불이 황혼(黃昏)의 불길같은 불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 다. 그리고 예의 불그림자가 잔잔히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하나의 손이 소리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손(手), 혈맥(血脈)이 힘차게 불거져 있는 거대한 손, 노도(怒濤)같은 분 노와 활화산(活火山)같은 충정의혈(忠貞義血)을 아는 손이다. 한 번쯤은 배신(背信)을 경험했고, 그로인해 복수(復讐)의 칼을 쥐었 으며, 또한 사랑하는 연인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던 손. 바로 무인 (武人)의 손이었다. 그 손은 오랫동안 낡고 빛바랜 붉은 양피지의 책자 위에 머물러 있었다. 허나 결국 손은 책자를 넘기기 시작했다. <무림사(武林史).> 아아, 무림. 장구(長久)한 수천 년의 세월을 걸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웅호걸(英雄豪傑)과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밤하늘의 유 성처럼 명멸(明滅)해 가는 열혈의 대지. 그 무림의 역사가 먼 세 월을 달려와 여기 누런 황지(黃紙) 위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늘게 떨리는 손과 함께 무림사 첫 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개천지장(開天地章). 천하에 산재한 일천마인(一千魔人)이 한데 모여 일성(一城)을 건 립하니, 혈륜마성(血輪魔城)이라 불리웠다. 일천마인은 방대한 혈 륜마성을 세우고 그 안에서 번성, 이후 마인(魔人)의 수(數)가 십 만을 헤아리도다. 그후 일천 년만에 혈륜마성의 문이 열리고 십만마인(十萬魔人)이 무림에 등장하니 전 무림이 도탄에 빠지도다. 혈륜마성의 어린아이라도 무림고수를 희롱할 정도였으되 그 마인 들의 무공은 가히 대해를 가르고 고산(高山)을 양단하도다. 무수한 영웅호걸, 협의지사(俠義志士)들이 의혈지검(義血之劍)을 들었으나 통한(痛恨)과 함께 산화해 갈 뿐이도다. 오오, 천지(天地)가 피구름 속에 통곡하도다! 이때 천외선부(天外仙府)가 있어 신비(神秘)의 문(門)을 열어 그 위대함을 천하에 공개하도다. 경천동지(驚天動地), 천번지복(天飜 地覆)의 처절한 대혈투(大血鬪)가 일백주야(一白晝夜)에 이르니, 혈륜마성의 십만마인 중 일천마인(一千魔人)만이 남았다. 연후 혈 륜마성은 통천가공할 한 가지 안배로써 천 년 후의 무림 대종말 (大終末)을 기약하니....> 손(手), 돌연 그 손은 극렬히 떨리기 시작했다. 개천지장에 얽힌 무림비사를 읽고 무혼(武魂)의 투기가 솟아난 것 이었을까, 아니면 그 개천지장에 남겨진 혈륜마성의 천년 저주가 발현(發現)되는 시기가 바로 당대였음을 떠올린 것이란 말인가? 아아...! ■ 검 1권 제1장 황궁서고(皇宮書庫)의 신비소년(神秘少年) ━━━━━━━━━━━━━━━━━━━━━━━━━━━━━━━━━━━ ① 서고(書庫), 그 너비가 무려 팔백여 장에 달해 거대한 지하광장(地下廣場)을 연상할 만큼 크고 넓은 서고이다. 천정에는 호안(虎眼)만한 네 개의 야명주(夜明珠)가 박혀있어 신 비롭고도 맑은 빛을 발하고 있고, 사방에는 온통 엄청난 분량의 책들로 가득차 있었다. 정확히 오백여덟 개의 서가(書架)는 실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 로 빽빽이 늘어서 있었으되 각 서가마다 오만(五萬) 권의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실로 방대한 분량이었다. 아니 엄청난 것은 분량만이 아니었다. 심오하고 난해한 각 분야의 학문비경(學文秘境)에서 방중비술(房中秘術)까지, 중원 뿐만이 아 니라 멀리 이국(異國)의 잡학(雜學)들까지 천하의 모든 책들이 여 기 총망라 되어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곳에 있는 책들의 제목(題目)만 읽는데도 평생이 걸릴 것 같았다. 서고의 한쪽에는 값비싼 자단목(紫丹木)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서 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또한 일견 화려하기 짝이 없 는 의자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의자 위에는 한 소년(少年)이 편안히 앉아 책을 읽 고 있었다. 대략 십오 세(十五歲) 가량 되었을까? 소년의 얼굴에서 풍기는 분 위기는 매우 미묘했다. 놀랍게도 소년답게 쾌활하고 앳된 치기(稚 氣)가 엿보이는가 하면, 자세히 보자면 음울한 기분도 느껴진다. 게다가 나이답지 않게 모든 것을 초탈(蓮蔘)한 듯한 극도의 허무 함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소년의 얼굴은 지극히 따분해 보였다. 지켜보고 있 는 사람이 있었다면 소년이 책의 내용을 하찮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과연 서탁 주위엔 수십 권의 책들이 엉망으로 내던져져 있었다. 한결같이 그 한 권만으로도 천하를 경동시킬 진귀한 고서(古書)들 이었다. 문득, 책을 읽는 소년의 눈이 강렬한 빛을 발하며 타오르기 시작 했다. 무한한 지혜(知慧)와 기지(奇智)가 응축된 듯 신비로운 정 광을 뿜는 눈이었다. 그 투명한 눈빛은 책장을 뚫어버릴 듯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고 개를 갸웃함과 동시에 소년의 눈에서 광채가 사라지고 없었다. 동시에 소년은 책을 어깨 뒤로 내던지며 골치아프다는 듯 중얼거 렸다. "에라, 모르겠다. 이 십만장서(十萬藏書)들 중 저 고서만 무슨 내 용인지 모르겠구나!" 아아, 이 얼마나 광오한 말인가! 허나 소년의 얼굴엔 추호도 과장 의 빛을 찾아볼 수 없어 그가 과연 서고안의 십만 장서를 모두 독 파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내 소년은 자단목 서탁 위에 다리를 턱 얹으며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버렸다. 동시에 소년의 코고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머리를 기대 기 무섭게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소년이 어깨 너머로 내던진 책은 활짝 펼쳐져 있었다. 헌데 그곳 에는 이상한 문양(夫厚)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책자의 내용 이 어떤 서체가 아니라 복잡한 한 장의 그림이었던 것이다. ■ 검 1권 제1장 황궁서고(皇宮書庫)의 신비소년(神秘少年) -2 ━━━━━━━━━━━━━━━━━━━━━━━━━━━━━━━━━━━ ② 스르륵! 헌데 이때, 서고의 한쪽 석벽이 열리며 왜소한 인영이 들어섰다. 예의 인영이 들어서는 순간 패옥(佩玉) 부딪히는 상쾌한 음향이 석실을 휘감기 시작했다. 먹구름을 뚫고 눈부신 햇살이 비추는가? 밀폐된 서고가 돌연 환해 진 것만 같았다. 들어선 인영은 자의를 걸친 궁장소녀(宮裝少女)였는데 그녀의 미 모는 실로 수려했다. 빙기옥골(氷肌玉骨)의 날씬하고 섬세한 교구(嬌軀)에 오관(五官) 은 그린 듯 미려(美麗)한 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희고 귀여 운 얼굴의 반을 차지할 만큼 크고 반짝이는 두 눈은 고아(高雅)한 기품과 천진함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었다. 머리는 가볍게 틀어 올려 그 위에 앙증맞게 예쁜 화관(花冠)을 살 짝 올려쓴 상태였다. "소랑(小郞)!" 소녀는 날렵하게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 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에는 작은 은쟁반이 들려져 있었다. 허나 기세좋게 코를 골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입가에 맺혔던 달콤한 미 소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맙소사!"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아미를 치켜떴다. 이어 질책의 빛이 담겨있 는 나직한 음성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소랑, 또 잠을!" 순간 코고는 소리가 뚝 멎었다. 이어 소년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 눈은 지극히 무심(無心)했다. 그 눈에 자의궁장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은쟁반을 내려놓고 날씬한 허리에 양손을 터억 얹고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허나 이런 일은 다반사인 듯,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부시시 일 어났다. 소녀가 붉은 입술을 쫑긋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소랑이 어떻게 대과(大科)에 장원급제해 천하제일문재(天 下第一文才)가 되었는지 알 수 없군요!" 소년은 여전히 무표정에 묵묵부답이었다. 그 눈빛 또한 아무런 빛 도 없어 과연 소녀의 음성을 들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허나 소녀는 그의 이런 태도에 익숙한 듯했다. "소랑은 정말!" 그녀는 혀를 차며 은쟁반에 놓인 환약(丸藥)을 내밀었다. 소년은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또 뭐요?" "만년학정련(萬年鶴精蓮)과 천년삼실(千年蔘實)에다 십여가지 약 재를 배합한 영약(靈藥)이에요." 일순 소년의 눈에 따분해 하는 빛이 떠올랐다. 허나 소녀는 차근 차근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이것을 복용하고 무학(武學)을 연마하면, 음... 백 년의 내공이 증진될 수 있다고 했어요." 만년학정련과 천년삼실, 실로 범인들은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다 는 진귀한 약재들이 아니겠는가. 특히 무인(武人)들이라면 꿈속에 도 열망하는 천하 기보(奇寶)인 것이다. 허나 소년은 너무도 태연히 고개를 저었다. "난 먹지 않겠소." 일순 소녀의 아미가 치켜 떠졌다. 동시에 예의 앙칼진 옥음이 다 시 터져 나왔다. "아니! 지난 여섯 달 동안 내내 책을 팽개치고 잠만 주무시더니 이젠 이것까지 거절하시는 건가요?" "그동안 내가 복용해 온 영약들만도 엄청나잖소? 더구나 그것들은 내게 아무 소용 없는 것이오." 일순 소녀의 아름다운 아미가 가볍게 꿈틀거렸다. "소용이 없다구요? 그건 무슨 뜻이죠, 소랑? 부황(夫皇)과 저는 소랑을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는데 왜 소랑에겐 소용이 없다는 거죠?" 갑자기 소년은 귀찮다는 듯 두 손과 머리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아, 알았소. 먹겠소!" 그는 단숨에 담홍빛 액체를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이 가볍게 흔들렸다. "소랑, 소랑은 확실히 달라졌어요." "뭐가 말이오?"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무엇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인가요?" 소년이 한동안 소녀를 바라보다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차분한 음 성이었다. "무엇때문에 괴로워 하느냐고? 나 북궁후(北宮厚)에게 괴로움이 있느냐고 물었소? 하하하...!" 갑자기 소년은 요란하게 웃기 시작했다. 어딘지 허탈함이 깃든 그 런 웃음이었다. 그 웃음은 갑자기 뚝 멎었다. 그리고 그는 본래의 침묵으로 돌아갔다. ■ 검 1권 제1장 황궁서고(皇宮書庫)의 신비소년(神秘少年) -3 ━━━━━━━━━━━━━━━━━━━━━━━━━━━━━━━━━━━ ③ 자의소녀가 그윽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예전의 소랑은 이렇지 않았어요. 늘 명랑하고 밝은 분위기로 주 위 사람들을 즐겁게 했어요. 헌데 변했어요. 저 많은 책들을 읽으 면서 변한 건가요?" 소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허나 결국 그녀는 결심을 굳힌 듯 질문을 던졌다. "아니면, 저와 정혼(定婚)된 사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요?" 문득 묵묵히 있던 소년이 정색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공주!" 소년은 냉정할만큼 무뚝뚝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앞으로는 내게 신경 쓰지 마시오!" 순간 소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내 그녀는 고운 아미를 세 우며 발끈해 소리쳤다. "흥! 장차 소녀의 부군(夫君)될 사람을 나 주령령(朱玲玲)이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쓴단 말인가요?" 상큼한 초생달같은 눈썹을 꼿꼿이 세우고 까만 눈을 부릅뜬 얼굴, 어찌보면 치기(稚氣) 어린 깜찍한 모습이었다. 일순 소년은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그녀의 이런 태도에서 오히려 진정(眞情)을 느낀 때문이었다. 헌데 이 소녀가 바로 주령령이었단 말인가? - 연화공주(連花公主) 주령령. 당금 황실의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서 자금성(紫金城)의 온갖 사 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황제의 무남독녀(無男獨女)이다. 방년 십삼 세, 허나 미모는 일국(一國)을 기울게 했다는 서시(西 施)도 따를 수 없을 정도요, 특히 성품이 티없이 밝고 구김이 없 어 황실의 말괄량이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어마어마한 장서(藏書)를 소유한 이곳이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렇다! 이 드넓은 서고야말로 천하인들이 꿈속에서라도 한 번 들 기를 갈망하는 절대비역(絶代秘域), 황실서고였다. 문득 주령령은 석류같이 터질 듯 붉은 입술을 잘끈 깨물며 입을 열었다. "흥! 오늘은 꼭 소랑의 대답을 듣고 말겠어요! 왜 이 령령만 보면 피하려는 건지 말이에요." "...!" 소년, 북궁후는 묵묵히 그녀를 응시했다. 맑고도 그윽한 눈, 그 깊은 동공 속에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발산되고 있는 그런 눈이었다. 북궁후의 눈빛을 대한 주령령은 자신도 모르게 전신이 위축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에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는 그 녀였으되 기이하게도 늘 그의 눈빛만 대하면 꼼짝도 할수 없어지 는 것이다. ■ 검 1권 제1장 황궁서고(皇宮書庫)의 신비소년(神秘少年) -4 ━━━━━━━━━━━━━━━━━━━━━━━━━━━━━━━━━━━ ④ 문득 북궁후는 퉁기듯 일어나 그녀의 앞을 스쳐가기 시작했다. 허 나 그가 마악 서고를 벗어나려는 순간 주령령이 다시 입을 열었 다. "소랑!" 일순 북궁후의 걸음이 멈춰졌다. 동시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공주! 폐하께 우리의 정혼을 파혼(破婚)시키도록 아뢰어 주시 오." 주령령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뭐... 뭐라구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북궁후의 담담한 음성이 이어졌 다. "부탁이오!" 비정(非情)하리만치 무심한 어조였지만 이 순간의 주령령은 보지 못했다. 북궁후의 두 눈에 뜨거운 빛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을 말 이다. 잠시 후 충격에서 벗어난 주령령이 북궁후의 등을 향해 처연히 부 르짖었다. "이, 이유가 뭔가요?" "...!" "제가 너무 버릇이 없었나요? 아니면, 소랑의 마음속에 다른 소녀 가 있었나요?" 천천히 북궁후의 고개가 저어졌다. "아니오." 주령령은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그럼, 왜?" 일순 북궁후의 두 눈 깊숙이 형용하기 어려운 우수(憂愁)의 그늘 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결코 일개 소년의 눈빛같지가 않았다. 마치 인생을 다 살아버린 노인의 염세적인 눈빛이라고나 할까. 인생의 열기(熱氣) 따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리고 북궁후는 끝내 입을 열지 않은 채 서고를 빠져 나가기 시 작했다. 주령령은 북궁후의 이런 태도가 어이가 없는 듯했다. 도대체가 믿 어지지 않는 표정인 것이다. 다음 순간 그녀는 야무지게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흥! 우리 사이를 파혼시켜 달라고? 어림없는 소리, 두고 보라지. 오히려 부황께 더 빨리 혼인시켜 달라고 졸라댈테니!" 허나 그녀는 부인할 수 없었다. 이 순간 무언가 가슴아린 고통과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의 가슴 저 아래에서 솟아나고 있음 을. ■ 검 1권 제1장 황궁서고(皇宮書庫)의 신비소년(神秘少年) -5 ━━━━━━━━━━━━━━━━━━━━━━━━━━━━━━━━━━━ ⑤ 천하제일의 고도(古都)임을 자랑하는 금릉(金陵)에서 동북(東北) 쪽으로 십여 리 가량 떨어진 한적한 교외에 한 채의 웅장한 장원 이 자리잡고 있었다. <천학장(天學莊).> 일개 장원의 이름치고는 너무 광오하지 않은가. 허나 머리엔 만학(萬學)을 담고 있으되 그 후덕정명(厚德正明)함 이 가히 대해(大海)를 뒤덮는다고 알려진 한 사람이 있어 천하인 들은 이 장원의 이름을 결코 광오하다고 여기지 않고 있었다. 당금 조정(朝廷)의 어사대부이며 실질적인 궐내(闕內) 제이(第二) 의 실력자 북궁천(北宮天)이 바로 그인 것이다. 이 천학장이란 이름또한 황상(皇上)께서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허나 이른바 천하제일의 대석학(大碩學) 북궁천의 이름은 오히려 당대에 이르러 어쩐지 빛이 바래는 느낌이었다. 그 이유는 이 천 학장에 존재하는 한 소년 때문이었다. - 북궁후(北宮厚). 하늘도 깜짝 놀랄 혜지(慧智)를 지녔으되 그 용모 또한 일월(日 月)조차 무색케 할 천하제일미동(天下第一美童). 천학장의 소장주이면서 또한 악동(惡童)으로 소문난 금릉의 최고 명물(名物). 봄(春),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로 춘조(春鳥)들의 울음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 양광아래 고색창연한 빛을 뿌리며 누워있는 천학장의 모습은 실로 영화(榮華)와 권력의 위엄이 도도히 서려 있는 듯싶었다. 이 천학장의 깊숙한 심처(深處)에 한적하기 이를데 없는 별원(別 院)이 한 채 있었다. 무수한 수목과 온갖 화초(花草)들로 잘 가꾸 어진 드넓은 화원(花園)을 끼고 있는 별채였다. 춘색일색(春色一色), 적요로움 속에 화향이 진동하는 화원속에서 언제부터인가 한 명의 중년인(中年人)이 꽃을 손질하고 있었다. 청포문사(靑袍文士) 차림에 청수한 용모의 인물이었다. 무심한 듯한 눈빛과 어찌보자면 평범하기만 한 기도이다. 허나 그 속에는 고고(高高)함과 깊숙이 감춰진 혜지(慧智), 그리고 감히 범접키 힘든 위엄이 은은히 풍겨나오고 있었다. 당대의 문성(文星)으로 꼽히는 천학장의 장주, 바로 북궁천이었 다. 이 순간 화초를 손질하는 북궁천의 손놀림 하나하나에는 실로 생 명을 다루는 듯한 신중함과 애정(愛情)이 깃들어 있었다. 간밤에 비(雨)가 왔는가? 화수림들은 촉촉한 습기에 젖어 있었다. 그 싱그러운 화초와 수목 내음이 좋았음인지 북궁천의 입가에는 이 순간 여유로운 미소가 가득해 있었다. "서랏!" 헌데 이때 화원 뒤쪽에서 한 소리 외침이 들린다 싶은 순간, 한 줄기 희끗한 물체가 화원을 가로질러 북궁천의 다리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이크!' 북궁천은 자신도 모르게 다급해 하는 신음성을 흘려내며 급급히 몸을 피했다. "서...!" 이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기세좋게 울리던 청아한 음성이 맥없이 흐려졌다. '이 녀석이 또?' 북궁천은 느리게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일그러진 채 굳어 있었다. 한 명의 소년이 낭패감에 흐려진 얼굴로 화초 속에 서 있었다. 무 척 다급했는지 버선발이었다. 흰빛 물체가 마구 치달려 오고 그 뒤를 소년이 쫓아오는 바람에 화원은 엉망진창으로 짓이겨져 있었다. 헌데 소년의 모습이 실로 특이하지 않은가.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는 듯한 크고 맑은 눈이며 우뚝한 코, 미소가 떠도는 듯한 붉은 입술 등 전체적인 용모에 소년답지 않은 기이한 위엄이 서려 있다. 소년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위엄은 북궁천에게서 엿볼 수 있는 것 과는 달랐다. 북궁천의 위엄이 오랜 세월동안 다져온 학문의 깊이 에 의지하고 있다면 소년의 것은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성 정에서 우러난 듯한 선천적인 위엄이었다. 헌데 북궁후라 했던가? 소년은 바로 황실의 서고에서 낮잠을 즐기 던 그 소년이 아닌가. 그러했다. 그는 바로 당대에 이르러 천학장의 장주인 북궁천의 명 성을 물리치고 단연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천학장의 소장 주 북궁후였다. ■ 검 1권 제1장 황궁서고(皇宮書庫)의 신비소년(神秘少年) -6 ━━━━━━━━━━━━━━━━━━━━━━━━━━━━━━━━━━━ ⑥ 북궁후는 흙이 잔뜩 묻어 있는 양 손을 앞으로 모으며 말했다. "아버님, 후아(厚兒)가 잘못했습니다." "음!" 북궁천은 아들의 모습을 훑어보며 묵직한 신음성을 토했다. 이때 한 마리 흰털을 지닌 동물이 눈치를 보듯 화수림 속에서 나 타났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신견(神犬)이었다. 헌데 그 넙죽한 입에 기이한 형태의 화초(花草)를 물고 있지 않은가! "아니, 저것은!" 북궁천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으익! 저것이!' 북궁후의 얼굴은 더욱 큰 낭패감에 일그러졌다. '큰일났다! 아버님께서 평소 아끼시던 구엽자란(九葉紫蘭)과 천령 구지초(天靈九枝草)를 캐낸 것이 들키고 말았으니!' 이때 북궁천은 돌연 백견으로부터 화초 가지를 낚아채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죽었다!' 북궁후는 속이 타다 못해 침이 말랐다. 도망갈 기회를 엿보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으나 아예 발걸음조차 떨어지지 않는 듯했 다. 헌데 이때 북궁천은 화초 가지를 확인하며 뜻밖에도 격동에 떨리 는 음성을 발하지 않는가. "후, 후아야, 진정 네가 이것을 접목(接木)시켰단 말이냐?" 그 음성에서 분노한 빛이라고는 추호도 엿볼 수 없었다. 화초의 형태는 진정 기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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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천중행 - 검 - 2편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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