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랑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헌데 북궁후의 눈에 부드러움과 질책의 빛이 음울하게 깔려있지 않은가? "아랑! 무엇인가 속이는 것이 있구나!" "헉!" 북궁후의 음성(音聲)은 담담했다. 허나 웬일인지 아랑의 몸이 휘 청했다. "내가 아는 아랑은 결코 이럴 수 없다. 이렇게 대담할 수 없는 것 이 아랑의 성품이었다." 북궁후가 아랑을 직시하며 말했다. "적어도 내 앞에서만은 아랑은 더할 나위없이 나약했다. 헌데 너 는 지금 변해 있다." "아!" "나는 아랑이 스스로 예궁의 마음을 끌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누 구냐?" 북궁후의 눈에서 질책의 빛이 흘러나왔다. 다음 순간 북궁후의 손 이 서서히 아랑의 눈 앞으로 올려졌다. "이것은 용장보검, 호신강기는 물론 금강불괴의 몸이라도 꿰뚫을 수 있는 보검이지, 나를 죽이려 했구나!" 북궁후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반 자 길이의 소검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아랑의 품 속에 있던 것이었다. 북궁 후는 아랑조차 속일 수 있는 절세적인 신투술을 지니고 있지 않은 가. "흑!" 아랑이 북궁후의 가슴으로 허물어졌다. "흑흑흑!" 그녀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오열이 높아감 을 들으며 북궁후의 눈이 젖어갔다. '알 수 없는 일! 아랑은 나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여 인이다. 누가, 어떻게 아랑을 조종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는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랑은 분명 멀쩡한 스스로 의 의지로 자신을 죽이기 위해 먼저 천예궁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에게 접근해 온 것이었다. ■ 검 3권 제22장 죽음의 함성 -5 ━━━━━━━━━━━━━━━━━━━━━━━━━━━━━━━━━━━ ⑤ 북궁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랑!" "흑흑, 소야!" 아랑은 북궁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더욱 흐느꼈다. "누가 너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단 말이냐?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단 말이냐?" 북궁후가 더듬거리듯 입을 열었다. 실로 그의 충격은 대단했던 것 이다. "흑흑, 저는 어쩔 수 없었어요! 그들은 내 아버님의 생명으로 나 를 위협...." 흐느낌 속에 더듬더듬 아랑의 말이 시작되었다. '아버님? 아랑의 아버님이라고?' 북궁후는 정신이 없었다. 그가 아는 아랑은 분명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고아(孤兒)가 아니 던가? "아, 아랑! 지금 무어라고 했느냐?" 북궁후가 놀라 외치며 아랑의 어깨를 흔들었다. "너에게 언제 아버님이 있었단 말이냐?" "흑흑, 있어요." 아랑이 눈물에 젖은 얼굴을 흔들었다. "저도 몰랐어요. 허나 얼마 전, 그들이 나의 아버님을 감금시킨 채, 소, 소야를 죽이라고!" "무슨 소리냐? 아랑에게 아버지가 있다니?" 북궁후는 아랑이 자신을 죽이려 한 일보다 아랑에게 부친이 있다 는 사실에 더욱 놀라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 누군가 아랑의 내력을 알아내 이용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란 누구요?" 북궁후가 조용히 질문했다. 어느새 그는 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만, 만류교!" 아랑이 마지못해 입을 열자 북궁후의 전신에서 순간 무서운 한기 가 솟아났다. '서문유허! 과연 그다운 짓이다!' "아랑!" 북궁후의 음성이 부드러워졌다. "아랑은 똑똑한 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바보로군!" 소야 악동의 기질이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것은 아랑의 마음을 감싸려는 그의 마음에서 비롯된 말투였다. "소, 소야!" 아랑이 눈물젖은 눈을 들었다. "이 바보야! 네가 모르는 아버님을 그들이 어찌 찾아낸단 말이냐? 단지 너를 이용하려는 술책인 줄 몰랐단 말이냐?" 아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예요, 저도 처음에는 그들의 음모인 줄 알았어요. 허나 그들 에게 붙잡혀 뇌옥에 갇혀 있는 아버님을 본 순간, 나는 그들의 말 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어요. 뇌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분명 이 아 랑의 아버님이었어요." 아랑의 눈에 다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훗! 한 번도 부모의 얼굴을 보지 못한 네가 그것을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었단 말이냐?" 북궁후가 짐짓 조소를 터뜨렸다. 허나 아랑의 얼굴은 굳어진 채 좀처럼 풀릴 줄 몰랐다. "맞아요. 나는 한 번도 부모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어요. 허나 사 람에게는 직감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 분은 분명 이 아랑을 낳아 주신 아버님이었어요." 아랑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자 북궁후의 내심에 욕설이 터져나 왔다. '서문유허, 기가 막히게 머리 좋은 놈이다! 어떻게 아랑을 이토록 깊이 세뇌(洗腦)시켰단 말이냐?' 북궁후가 아랑을 직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갇혀 있는 그 사람이 너의 아버님이라고 하자.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이나 들려다오." 북궁후는 아랑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섰다. ■ 검 3권 제22장 죽음의 함성 -6 ━━━━━━━━━━━━━━━━━━━━━━━━━━━━━━━━━━━ ⑥ 북궁후는 아랑이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묵묵히 아랑을 직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아랑은 결심한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저는 저의 아버님을 알고 있다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가 아랑을 찾아왔겠지." 아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요. 불쑥 저를 찾아 온 사람은 나를 아버님에게 데려가 겠다고 했어요. 저는 원래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한 가닥 희망 때문에 가지 않을 수도 없었어요." 아랑의 음성은 젖어들고 있었다. "그 결과 저는 지하뇌옥에 갇혀 있는 한 노인을 보게 되었고, 그 분이 저의 아버님임을 확신하게 되었어요." "으음, 단지 직감 하나만으로 그렇게 확신하였단 말이냐?" "그래요. 허나 저는 믿어요. 그분이 제 아버님임을!" "허어!" 북궁후는 아랑의 고집에 가슴이 답답해 옴을 느꼈다. "더구나 그들은 저희 과거내력을 모두 알고 있었어요." 아랑이 말을 덧붙이며 고집스럽게 눈을 돌렸다. "소야! 저는 어떡하면 좋아요?" 그녀의 눈이 애처롭게 젖어들고 있었다. '으음, 더 이상 설득해야 믿지 않을 것같군!' 북궁후가 고개를 흔들었다. "좋다. 내가 너의 부친을 구해내겠다. 그곳이 어디냐?" "그것은 안되요." 아랑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천하에 못갈 곳이 없고 황궁이라 해도 내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나도 그후 몇 차례나 아버님을 구하려 했지만 들어가지 못했어요. 그곳을 지키는 고수들은 실로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자 들이에요." 북궁후의 눈에서 고소가 묻어났다. "후후, 그것은 내가 아랑보다 강하지 않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 그것은 아니지만!" "그곳이 어디냐?" 북궁후가 재차 질문했다. "무산(武山) 천마봉(天魔峯)이에요. 허나!" 아랑이 겨우 입을 열었다. "알았다. 내 한 달 안에 기필코 너의 부친을 구해내겠다!" 북궁후가 몸을 일으켰다. 이어 아랑에게 다가와 가만히 아랑의 손 을 잡아갔다. "아랑! 아랑이 짐짓 나를 사랑하는 척하여 예궁의 마음을 열게 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문득 아랑이 눈을 들어 북궁후를 그윽히 응시했다. 헌데 그 눈에 은은히 원망같은 빛이 떠돌고 있지 않은가? '소, 소야, 그렇게만 알고 계신가요?' 그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똑! 한 방울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제가 소야를 위해 기실 부친을 포기한 것을 모르시나요, 제가 소 야에게 검을 겨눈 것은 오늘 결정한 것이에요. 아버님을 포기했다 가 오늘 예궁 언니가 대가의 방으로 저를 밀어넣는 순간 마음이 바뀐 것이에요.' 아랑의 마음은 울고 있었다. 문득 부드러운 손 하나가 그녀의 얼 굴을 매만지며 눈물을 닦아냈다. "아랑... 내가 말을 잘못한 듯하구나." "흑!" 아랑이 스르르 북궁후의 가슴으로 무너져 내렸다. "아랑! 나는 이미 아랑의 마음을 알고 있다. 부친을 포기하는 일 이 있더라도 결코 나를 죽일 수 없음을." 북궁후는 그녀를 가슴에 안고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서문유허, 이 불쌍한 아랑을 이용하려 한 놈, 결코 용서하지 않 을 것이다!' 그의 눈에 천공의 어둠이 담겨오고 그 어둠 속에서 무서운 살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 검 3권 제22장 죽음의 함성 -7 ━━━━━━━━━━━━━━━━━━━━━━━━━━━━━━━━━━━ ⑦ 무산(巫山)! 중원오악(中原五嶽)에 버금갈 정도로 기이한 산세와 풍광(風光) 등이 아름다운 명산(名山) 중의 명산이다. 오색(五色)의 가을빛으로 채색된 무산은 그야말로 선경(仙境)인가 싶었다. 천마봉(天魔峯). 무산의 봉우리 중 유독 절정을 빛내고 있는 봉우리였다. 이 천마 봉에 시리도록 푸르스름한 잔월(殘月)이 걸렸다. 사위는 적막하기 이를데 없고 산중의 고요는 점점 더 깊어가고 있었다. 헌데 이때 문득 하나의 백영(白影)이 나타나 천마봉을 오르기 시 작했다. 야조(夜鳥)인가? 백영의 움직임은 실로 야조(夜鳥)를 방불케 하듯 정상을 향해 치솟았다. 백영은 천마봉의 중턱에 이르러 몸을 멈췄다. 푸르스름한 잔월에 백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시리도록 백옥같이 빛나는 피부, 잔월이 밀려날 뛰어난 용모, 바 로 북궁후가 아닌가! "으음, 검마 뇌소천이 갇혀 있는 곳이 이쯤 어디엔가 있을텐데?" 북궁후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뇌소천! 그 자를 필히 구해내야 한다." 북궁후에게서 무서운 살기가 뿜어졌다. "서문유허, 가증스러운 놈!" 지옥의 공포를 느끼게 할 무서운 살광이 북궁후의 전신에서 뭉클 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북궁후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 다. "훗훗, 저곳이군." 십여 장 정도의 거리에 숨은 듯 자리한 하나의 암동이 그의 눈에 잡혔다. 그의 신형이 거침없이 암동을 향해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 검 3권 제22장 죽음의 함성 -8 ━━━━━━━━━━━━━━━━━━━━━━━━━━━━━━━━━━━ ⑧ 빛이라곤 단 한 점도 스며들지 않는 암흑의 동굴이었다. 시커먼 동굴 안을 세세히 살펴보던 북궁후의 눈이 번쩍였다. "후훗, 동굴 자체가 진식으로 꾸며져 있군!" 북궁후의 입가에 조소의 빛이 스치며 서슴없이 안으로 진입해 갔 다. 동굴은 과연 그 자체가 모두 진법에 의해 꾸며져 있었다. 일단 진입을 하는 순간 모든 상황이 확 변하면서 협소했던 동굴 안은 돌연 희뿌연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음침한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안개속에서 기이 한 나무들이 귀신의 머리칼처럼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 보 였다. 칙칙한 늪지같은 것들이 펼쳐져 있었다. 늪지와 기목들 사이 여기저기에서 시퍼런 인광이 번뜩이고 있었 다. 일견 심상치 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에 분명했다. 허나 북궁후에게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백팔사로미종진(百八死路迷踵陣)? 이 복잡한 것을 동굴 속에 펼 쳤군." 북궁후는 내심 감탄을 흘렸다. "이곳에도 제법 인재가 있긴 있나보군." '허나 내게는 아무 쓸모없는 것일 뿐!' 놀랍게도 그의 신형이 붕 떠오르더니 마치 거미처럼 허공에 찰싹 달라붙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는 달라붙은 채 허공을 타고 그대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 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허공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천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 북궁후는 아주 간단하게 백팔사로미종진의 생 로를 찾아낸 것이었다. 진의 내용을 알아낸 북궁후는 거침없이 들 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갔을까? 늪지가 끝나면서 시커먼 동굴이 다시 입을 벌리고 나타났다. 결국 동굴의 중간어림에 백팔사로미종진이 펼쳐져 있었 던 것이다. 십여 장쯤 계속 천장을 타고 들어가던 북궁후의 눈에 한순간 기광 이 폭사됐다. '두 명? 그렇지, 보초가 없을 리 없지!' 미세한 파공음이 일었다. 순간 그의 신형은 거의 안 보일 속도로 쏘아져 갔다. "윽!" 탁한 신음과 함께 동굴에 잠복해 있던 두 명의 흑의인이 피를 토 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슨?" 맞은편에 또 다른 자가 의혹의 눈을 돌린 순간, 북궁후의 몸은 이 미 무서운 속도로 그를 덮치고 있었다. 흑의인이 답답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나뒹굴었다. 북궁후의 모습 도 보기 전에 혈도가 제압된 것이었다. "조용히 해라. 묻는 말에 대답하면 죽이지 않으리라." 북궁후의 음성은 나직하기 이를데 없었다. 허나 그 음성 속에는 무서운 한기가 담겨져 있어 흑의인은 두 눈만 부릅 뜬 채 공포에 몸을 떨었다. 흑의인의 눈에 공포에 질린 빛이 떠오르자 북궁후는 혈도를 풀어 주었다. 헌데 혈도가 풀리자마자 흑의인이 번개같이 덮쳐들지 않 는가? "흥!" 북궁후의 입에서 싸늘한 냉소가 터졌다. 순간 흑의인은 신음도 지 르지 못한 채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그의 한 팔이 북궁후의 발길 에 의해 부서져 있었다. "네가 자초한 일! 어디 계속 견뎌봐라!" 북궁후는 냉소를 터뜨리며 재차 발을 놀렸다. 그의 또 다른 팔 하나가 피를 뿜으며 떨어져 나갔다. 흑의인은 이 미 또다시 혈도가 제압되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검마 뇌소천이 갇힌 곳이 어디냐?" 흑의인의 눈에 절망이 스쳤다. 북궁후의 손에서 잠력이 뻗쳐나가 그 자의 혈도를 풀어 주었다. "자! 말하겠느냐? 아니면 다시 두 다리와 이별을 하고 싶은가?" "악, 악독하구료." 두 팔이 모두 으스러진 그는 전율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재차 묻겠다! 검마 뇌소천은 어디에 갇혔느냐?" 북궁후는 담담히 질문을 던졌다. 허나 그런 그의 태연한 태도에 상대는 짙은 공포를 느꼈다. "다, 당신은 누구요?" "북궁후!" "부, 북궁후!" 흑의인은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대답해라! 네가 날 알았으니 네 스스로의 처지도 알 것이다!" 흑의인은 떨리는 음성을 발했다. "지... 지하뇌옥이... 석동의 밑에 지하뇌옥이 있소." "그곳에 검마 뇌소천이 있나?" "그, 건 나 역시 잘 모르오. 나는 일개 수문무사요. 단지 이곳에 지하뇌옥이 있을 뿐, 그곳에 누가 있는지는 나도 모르오." "그래?" 북궁후는 차갑게 웃었다. "그건 믿기로 하고, 네 무공은 이곳에서 어느 정도냐?" "입구 보초에 불과한 내가 무공이 있어야, 겨우 삼류에 불과하 오." "인원은 얼마나 있고 일류는 어느 정도냐?" "인원은 모르오. 저는 이곳 이상을 들어가 본 적이 없소." 북궁후는 그 자의 말이 사실임을 느꼈다. 흑의인은 재차 혈도를 제압당해 쓰러지고 그 순간 북궁후는 이미 오 장 깊숙이 진입해 가고 있었다. 북궁후는 모퉁이 두 개를 돌았다. 동굴은 차차 비스듬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 검 3권 제22장 죽음의 함성 -9 ━━━━━━━━━━━━━━━━━━━━━━━━━━━━━━━━━━━ ⑨ 거의 기척도 없이 날카로운 검기가 그의 좌우에서 짓쳐왔다. 그 기세는 예리하고 악독하여 예사 고수가 아님이 분명했다. "흥!" 검세는 이미 북궁후의 반 자 정도의 거리에까지 이르렀다. 순간 북궁후의 손이 번개같이 앞으로 뻗었다. "헉!" 경악성이 터졌다. 놀랍게도 북궁후는 양 손에 두 자루의 검을 움 켜쥐고 있었다. 극히 경미한 신음과 함께 두 흑의인이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어느 틈엔가 그들의 목줄기에는 북궁후의 손에 있던 두 자루의 검이 깊 숙이 박혀 있었다. "무슨 일이냐?" 삼 장 정도 떨어진 전면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그곳은 동굴의 아 래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북궁후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의 신형은 한 줄기 섬광과도 같이 음성을 발한 흑의인을 덮쳤다. "누, 으악!" 짤막한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상대는 영문 도 모른 채 가슴이 피떡이 되어 썩은 나무토막 넘어가듯 나뒹굴었 다. 북궁후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이곳이 지하뇌옥으로 가는 곳인가 보군!' 돌계단이 이어진 안쪽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시간이 좀 지체됐다. 놈들이 이제 나의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 다!' 북궁후는 다급한 마음이 되어 신형을 계단 밑으로 날렸다. 고막을 갈기갈기 찢는 파공음과 함께 그의 전면에 은빛 광망이 번 뜩였다. '암기!' 맹독이 발라진 수백, 수천의 암기들이 현란한 빛을 뿜으며 맹렬하 게 쏘아져 왔다. 그 속도는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제법 기세가 맹렬하군!' 북궁후의 안색이 약간 굳어졌다. 그의 안력은 날카롭기 이를데 없 는지라 그것이 바로 내가강기를 파괴하는 암기임을 알아본 것이 다. "타앗!" 북궁후의 몸이 벼락치듯 뒤집어졌다. 동시에 기이한 운무가 그의 양손에서 소용돌이쳤다. 석동을 뒤흔드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지며 그에게 쏟아져 오던 암기들이 일순 형체를 감추었다. "저, 저럴 수가?" "저, 저놈은 사람이 아니다!" 돌연 어디선가 경악에 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북궁후의 손에는 조금 전까지 은빛 광망을 뿌리던 암기들이 전부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허나 다음 순간 암기를 잔뜩 쥐고 있던 그의 양손이 전면을 향해 뿌려졌다. 은빛의 암기들이 그의 손을 떠나자 좀전보다 더욱 기쾌 무비한 기세로 쏘아졌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석동 안쪽에서 시뻘건 피보라가 촤악! 뿌려졌 다. 거의 동시에 고슴도치 형상의 다섯 시신이 힘없이 바닥을 나 뒹굴었다. "후후, 암기를 사용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사용해야 제맛이 나 지 않는가?" 북궁후는 싸늘한 냉소를 흘리며 바닥에 나뒹구는 시신을 바라보았 다. 허나 이내 신형을 돌리며 걸음을 옮기는 순간, 시꺼먼 흑영 세 줄 기가 북궁후의 주위를 에워쌌다. 북궁후는 흠칫 놀라며 자신의 주 위에 나타난 인물들을 주시했다. "누구냐?" 그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죽음의 잿빛, 섬뜩하리 만큼 피냄새가 흑의인들의 전신에서 뭉클 뭉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죽음이 흐르는 사안(死眼)의 복면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누구? 네놈이 침입했으면서도 누구냐고 묻는 거냐?" 지독한 한기가 서리는 음성이었다. 북궁후는 그 말에 실소를 터뜨렸다. "후후, 그렇군. 자네들이 이곳의 주인이군. 난 이곳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 불과하고...." "겁도 없이 함부로 이곳까지 들어오다니!" 핏빛 감도는 혈안(血眼)의 복면인이 음산한 음성을 짓씹었다. "이곳에 발을 들여 놓은 이상 오직 죽음 뿐이다!" 저주가 서린 자안(紫眼)의 복면인이 기광을 폭사시켰다. 북궁후는 이들의 살기 넘치는 음성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조소를 띠었다. "후후, 난 비록 초대는 받지 않았으나 볼 일이 있어 온 것이고 또 한 그대들이 이곳의 주인들이라 하나, 나의 길을 막으면 할 수 없 이 그대들의 시신을 밟고 지나갈 수밖에 없네." "뭐, 뭣이? 이 찢어죽일 놈!" "네놈은 우리가 누군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지껄이느냐?" "후후, 그대들이 염라사자라도 되는가?" 이때 혈안의 복면인이 살벌한 안광을 이글거리며 괴소(怪笑)를 흘 렸다. "하기야 너같은 애송이 놈이 본좌를 알 리가 없지! 벽력참인객(霹 靂斬忍客)이라고 들어봤냐?" 순간 북궁후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벽력참인객이라면 팔십 년 전부터 전 중원을 떨어울리던 자객(刺 客)들이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벌인 살인행각은 도합 삼천이백 번이었는데 단 한 번 실패한 것을 끝으로 무림에서 은퇴하였던 것이다. 그 한 번의 상대가 바로 천기신군 모용선학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 는 사람은 무림에서 극소수에 불과했다. ■ 검 3권 제23장 검마(劍魔)의 부정(父情) ━━━━━━━━━━━━━━━━━━━━━━━━━━━━━━━━━━━ ① 허나 북궁후는 약간 이채의 눈빛을 발했을 뿐 입가에 냉소를 쳤 다. "후후, 그럴까? 나 역시 이곳이 호랑이 소굴인 줄 알고 왔으나, 이리 새끼 뿐이라 실망하던 참인데!" 순간 자안의 복면인이 검날을 치켜들며 벼락같이 덮쳐 들었다. "수라마빙류(修羅魔氷流)!" 일순 검끝에 새하얀 서리가 서리며 백색의 기류가 쏟아졌다. 가공할 냉기를 동반한 검광은 허공에 새하얀 서릿발을 뿌리며 북 궁후의 목줄기를 짓쳐왔다. "후후, 좋은 수법이군." 북궁후는 짤막한 냉소와 함께 몸을 틀어 일장을 뿌렸다. "천(天), 멸(滅), 참(斬)!" 천단이십사기 중 일곱번째 절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한 줄기 눈부 신 듯한 휘황한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어느 틈엔가 뽑아든 북궁 후의 한 자루 검에서 일어난 찰나지간의 현상이다. 자안의 북면인은 일순 눈 앞이 환해짐을 느꼈다. 단지 그것뿐 비 명도 없었다. 허공으로 자욱한 피보라가 포물선을 그리며 뿜어져 나왔다. 이어 머리서부터 정확히 반으로 절단된 몸뚱아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 이럴 수가!" "저... 토록... 빠른... 검세가 있다니!" 두 명의 흑의인은 그 광경에 눈알이 찢어질 듯 부릅떴다. "죽어랏!" 두 복면인은 짧게 소리치며 수중의 검을 번개같이 휘둘렀다. 가공 할 검광이 부챗살처럼 쏟아지며 고막을 뚫을 듯한 파공음이 일었 다. 막강한 검기는 북궁후의 전신을 휘감으며 덮쳐갔다. 허나 두 복면인은 일순 텅 빈 공허를 느끼며 급급히 검을 거두었다. "천정!" 그들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빠른 일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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